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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김정남 칼럼] 오송회사건을 아시나요
기사입력: 2008/12/23 [06:5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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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송회사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민주인사들이 11월 25일 광주고법 301호 법정 앞에서 '사법정의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인병문 기자

 
얼마 전 광주고등법원의 재심에서 세칭 오송회(五松會)사건 관련자 9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 본인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 점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사죄드린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실로 26년 만의 일이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나는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당시 이돈명·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이 사건 변론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탠 기억이 있기 때문에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한 권의 시집이었다. 1948년에 월북한 시인, 오장환(吳章煥)의 네 번째 시집 「병든 서울」이 그것이었다. 당초 경찰은 이 시집 복사본을 소지한 사람들이 모두 현직 국어교사들이라는 점에 비추어 유야무야 처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대공경찰은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이를 계기로 어마어마한 사건 하나를 조작해 내기로 작정했다. 이들이 당시에 이렇게 작심한 이상, 착하기만 한 선생님들은 도마 위에 놓인 고기나 다름없었다.
 
이광웅이 이 사건의 주범이 된 것은 그 시집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사건이 그 무렵 아람회, 한울회라는 이름으로 대전에서도 조작되어 있었다.

대공경찰은 사건 하나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이 사건의 제2인자 격인 박정석(朴正石)의 증언에 의하면,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인 이들은 1982년 11월 2일, 전주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얼굴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를 가진 신갑생이라는 고문기술자 등으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체험을 겪는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영향 받은 사람, 관계있는 사람을 대라는 고문에 문규현, 조성용의 이름이 신음처럼 튀어나왔고, 조성용은 그때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황소처럼 목이 매여 끌려나와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합류하게 된다.
 
고문은 이들로 하여금 우선은 살고 봐야 하겠다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저들이 불러주는 각본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들은 난세를 사는 지식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놓고 고민했고, 민주적인 교사,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또 산책을 좋아하여 햇빛 찬란한 날, 들과 산을 풋내를 띠고 돌아다녔다.
 
그 산책길에서 그들은 문학과 시와 세상을 이야기했다.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정열적인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길이라고 믿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되는 것이 그들이 눈에 비쳤다. 이는 국민의 저항의식을 두려워 한 반민주적, 반민중적 독재권력의 성격 때문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4.19날에 위령제라도 지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막걸리 10병과 오징어안주를 들고 학교뒷산에 올라갔다.
 
소나무 아래서 4.19과 5.18 광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식을 마치고 술 몇 잔씩 돌려 마시며 자연스럽게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를 토로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정의로웠는가”를 놓고 토론하고 반성했다.
 
이때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일상적 삶과 가족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대공분실은 그 뒤끝에 이어서 “다섯 명 전원이 손을 포개어 놓고 맹서하며, 오송회라는 명칭의 반국가 단체조직을 구성하고 강령을 채택했다”고 사실을 조작했다. 오송회라는 이름도 그들이 지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9명의 피고인 중 3명이 실형을, 그리고 나머지 6명은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다. 무죄여야 마땅한 노릇이지만, 그때로서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고법에 가면 나머지 3명도 석방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광주고법의 2심은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던 6명마저 법정구속하면서 전원에 실형을 선고하였다. 법정이 온통 아비규환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이때 대법원도 형을 그대로 확정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 1, 2심 재판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어눌해 보이면서도 순수했던 이광웅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던 박정석의 모습이 선하다.
 
학교에서 이광웅의 별명이 ‘들잠’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복역 후 그는 서울에도 곧잘 나타나 문인들과 어울렸다고 하지만, 그는 내가 만나보지 못한 채 1992년 타계했다. 그는 이른 봄철, 강가에 피어있는 하찮은 들꽃을 보고도 감격하는 시인이었다.
 
▲ 김정남 언론인     © 취재부
금강 하구둑에 가면 돌멩이 하나로 우뚝 선 그의 시비(詩碑)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거기도 가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의 시 ‘목숨을 걸고’는 우리의 가슴을 치고 있다.
 
“이 땅에서 /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한다.” 과연 그는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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