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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의 길
오체투지, 촛불 정신과 다르지 않다
기사입력: 2008/09/25 [07:0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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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순례 중인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 불교환경연대

1. 오체투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오체투지란 양 무릎, 양 팔꿈치 그리고 이마가 땅에 닿게 절하는 인사법이다.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신의 몸을 지저분한 땅에 닿게 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 교만함을 떨쳐버리고 가장 낮은 하심(下心)으로 가자는 것이다.
이런 오체투지를 지난 9월 2일부터 존경받는 성직자들이 수행하고 있고 이에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얼핏 보면 종교적 구도 순례 같은 오체투지가 사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되고, 그것이 많은 국민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면, 이 시대에 오체투지의 역사적 의미를 적극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성찰은 한국사회 지평을 이해하고 우리 공동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묻는 실천적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오체투지 순례의 시대적 의미
 
1) 민주주의와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위한 수행
 
출발하는 지점에서 9월2일자 수경스님의 발원문이나 문규현 신부의 기도문을 보면, 오체투지 순례의 포괄적 성격이 드러나 있다.
 
“이 천박하고 황폐한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이 길을 떠납니다.”,

“이명박 정권의 냉혈 실용주의와 오만과 독선을 견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체투지 순례는 우선 이명박 정권의 전횡과 탄압에 대한 종교인의 비폭력적인 항거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은 국회 과반수 의석과 함께 민간 파쇼 통치행태를 거듭하고 있다. 오랜 기간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이루어온 민주주의 성과를 한순간에 역행시키면서, 오로지 부자들과 외세의 이익을 위해 제 국민들을 노예처럼 만들고 있음을 이미 지난 반 년 간 통치로 보여주고 있다.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드러내놓고 공영 언론을 장악하고 있으며, 기업에게는 ‘프랜들리’라며 각종 규제를 다 풀어주는 대신, 노동자들에게는 비정규직의 고통을 더욱 깊게 하고 있고, 서민들은 유례없는 물가고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교육현장을 살인적인 경쟁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경제난 속에서도 사교육비만큼은 치솟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사문화된 국가보안법을 멀쩡하게 다시 살려 정치적 반대자들을 무차별로 감옥에 집어넣고 있고,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의 노력들은 모두 대결과 불신으로 되돌리며 한반도를 전쟁 접경으로 몰아가고 있는 등 이명박 정권은 이성을 잃은 난폭한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제어장치가 고장 난 버스에서 미친 운전사를 만난 격으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향한 노력들은 한순간에 통제와 억압의 비이성적인 야만 사회로 급격히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미국 광우병 위험 소고기 수입문제로 촛불을 들었고, 촛불시위는 청소년들이 시작하여 유모차를 끈 엄마들이 같이 나섰고,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자영업자, 언론인, 노동자, 농민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났던 평화적인 의사표현의 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이마저도 색소 물대포 등을 국민들을 향해 무차별로 쏘아대며 강제로 해산에 나섰는가 하면, 백골단을 부활시켜 촛불 시위자들을 검거 탄압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수배하거나 법에 걸어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국민들의 초보적 권리마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탄압을 받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일신의 구원이나 해탈만을 바라는 종교인은 무엇이겠는가?
 
두 성직자의 오체투지 순례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마구잡이 폭력에 탄압을 받는 이 백성들을 위해 두 성직자는 온몸으로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떠난 것이다.
 
2) 촛불정신의 연장으로서 오체투지 순례
 
이명박 당선 뒤 캄캄한 암흑과 절망뿐인 겨레의 가슴 한가운데 촛불이 타올랐다. 촛불이 밝힌 희망은 민족의 자존이자 품위이며, 신뢰와 진정성이었다.
 
촛불은 국민들의 건강주권을 쉽게 넘겨버린 사대 매국정권에 맞서 일어난 순수한 시대정신이다. 국민 모두가 한바탕 품격 높은 촛불 문화의 장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볼 때, 21세기를 살며 22세기를 준비하는 시민적 자존심의 한 단면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운동의 주체 면에서 보아도 촛불은 새로웠다. 과거와 다르게 이번에는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주권의식을 가진 자발적인 참여대중이 주체였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서 나온다.’ 헌법 제1조를 노래로 부르며 지휘부와 배후 없는 촛불운동이었기에 누구나 이 운동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주권 행사 과정이 연대, 지혜, 토론, 소통의 방식으로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 국민 다수와 함께 한다는 자신감 때문에 여유와 유머, 낙천성과 자발성과 생명력이 넘쳐났다.
 
차가운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온수, 세탁비’ 라고 웃으며 외쳤다. 대치와 긴장을 평화와 웃음으로 바꿔 이명박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경찰의 능력을 무력화하고 민주주의 초석으로 거듭나길 바랐던 것이다. 촛불은 가히 주권과 민주주의의 상징적 표식이었다.
 
그런데 촛불에게 행한 이명박 정권의 탄압은 민중들에게 수난과 상처, 모욕과 폭력, 수배와 구속이라는 밀어붙이기식 탄압, 즉 파시즘적 행태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해서 촛불을 치켜든 국민들은 사랑과 존경은커녕, 좌절과 울분을 삼키게 되었다.
 
더 두고 볼 수 없는 상황, 지금 여기에서 두 성직자는 고뇌의 결단을 해야만 했다. 문규현 신부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오체투지 순례 길을 떠나며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순례의 이유와 다짐을 밝히고 있다.
 
“오체투지, 이 여정은 특히 손에 가슴에 생활 속에 촛불을 피워 올린 청소년들과 수많은 국민들에게 드리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그 아름다운 불빛들에게 무엇으로 응답을 해야 할지, 더불어 무엇을 해야 할지 수없이 고뇌하고 기도했습니다. 하여 아주 단순하고 응집된 표현으로 이 길을 갑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향해 절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하고 진정한 마음들, 그 착하고 여린 마음들을 품고 기억하며 이 길을 갑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키고 생명력 있고 희망이 있는 사회를 위해 끝까지 가겠노라는 맹서의 길을 갑니다.”
 
순결한 촛불에 대한 존경과 사랑, 천박하고 황폐한 정권 앞에서 용기를 잃지 말자는 격려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의지까지 이 글에서 밝힌 그대로 오체투지 순례의 시대적 의미를 파악하면 되겠다.
 
수경스님과 문규현신부 일행은 오체투지 순례를 떠나기에 앞서 조계사 내 촛불 시위 수배자들의 천막 농성장을 찾았다. 수배되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정한 가운데서도 조계사 촛불시위 수배자들은 일신의 안위보다 촛불이 꺼지지 않고 다시 타오르길 희망했다. 두 성직자는 이곳에서 오체투지 순례가 촛불의 마음이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였다. 따라서 오체투지 순례 행위는 촛불정신과 다르지 않다.

3) 비정규직 등 탐욕적인 신자유주의 희생자들의 고통에 동참
 
두 성직자는 조계사에 이어 KTX/새마을 여승무원들의 투쟁의 현장을 찾았다. 900일이 넘도록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싸워 온 노동자들이 결국 목숨을 걸고 45미터 조명 철탑으로 올라가서 농성을 시작한 지 며칠째 되는 날이다.
 
기차가 지나가거나 바람이 불면, 심하게 흔들리는 고공철탑에 올라가서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공포를 이겨내며 싸우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였다. 밑에서 농성투쟁을 하던 KTX/새마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제 비정규직 문제가 전체 노동자의 문제라며 순례단에게 비정규직이 해결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한 호소를 하였다.
 
그리고 기륭전자 투쟁 현장을 찾았다. 그날은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김소연 분회장이 단식한지 83일째 되는 날이었다. 콘테이너 박스에서 링거액을 맞으며 단식을 지속하고 있는 김소연 분회장은 살아있는 송장이었다.
 
이날은 기륭전자 비정규 여성노동자의 싸움이 1천100여일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한 달 내내 눈치보아가며 뼈 빠지게 일해 겨우 641,850원이란 처참한 임금을 받던 여성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싸우고 있는가를 기륭전자 분회 조합원들은 두 성직자들에게 하소연하였다. 성직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다만 기도하겠다며 들어줄 뿐이었다.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연들 담아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늘에 염원을 올린다’(9. 5 묵상)
 
오체투지 순례단 사전 일정은 이렇게 순례길 고행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는 시간들이었다. 신자유주의 제국의 이익에 충실한 정권이 들어선 뒤로 더 확대되면 확대되었지 해결전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정규직, 이 땅 민중들의 처지에 동감함으로써 오는 아픔을 온몸으로 떠안고 떠나는 길이었다.
 
경쟁과 효율을 앞세운 세계시장 질서로 편입은 결국 한국 사회에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거쳐 비정규직 800만을 만들어 냈다. 비정규직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필요하면 쓰고 버리는 일회용 종이컵과 같다.
 
특히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천민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형적 틀로서 악명이 높다. 높아지는 노동 강도나 과도한 긴장 속에서 일하도록 하며 노동자의 최소한 인간다운 삶은커녕 밤낮 없이 일을 해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짐승처럼 살라하는 것이 한국적 신자유주의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 이것은 밥을 위한 투쟁이지만 이 야만의 땅에서 인간됨을 옹호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오체투지 순례단은 이런 싸움에 동참하며 차별과 고통으로 실의와 비탄에 빠진 채 잠 못 이루는 민중들의 원망을 가장 낮게 싸안고 간다.
 
하늘에 사무친 인간의 절규를 들으면서, 이 땅 민중들에게 속죄의 기도를 드리며 하늘이 해원해 주기를 기도한다. 비정규직이 세계 1위인 나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찾아 나선 순례의 길은 신자유주의라는 천박한 자본의 논리와 타협 없는 투쟁의 길이기도 하다.
 
4) 자연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 훼손에 대한 경고
 
우리가 이미 원시 상태의 자연인으로 살 수 없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양질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개발 이익에 앞서 생태가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현대적 가치와 성찰을 비웃는다. 이명박 정권은, 철도보다 물류비용이 10배 이상 드는데도 한반도에 대운하를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대운하 반대 여론이 거셀 때는 물러서는 듯 보이다, 시간이 흐르면 대운하 문제를 슬그머니 끄집어내서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두더지 같은 행태 속에서 대운하 삽질을 강행할 속뜻이 바로 읽힌다.
 
대운하는 경제적 실용성도 없고 환경과 생태 가치에도 어긋나는, 한마디로 역천(逆天) 행위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강산을 파헤쳐서 토목공사 바람을 일으키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대운하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누구에게 위임받은 권한인지 알 길이 없다.
 
국토와 국민을 개조 대상으로 삼고 경쟁과 실용을 숭배하는 천박한 실용주의자인 이명박 정권에게 오체투지 순례단은 바보스럽고 누추하게 보이겠지만, 이들은 굼벵이 기듯 온몸으로 땅에 절하며 민심이 천심임을 알게 해달라고 발원한다.
 
“하늘과 땅이 하나요,
천심이 민심이고 민심이 천심인줄 알게 하소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민의 앞에 겸손하고 공경하게 하소서.
인간과 자연이, 숲과 꽃이, 바위와 돌이 하나인 줄 알게 하소서.
이웃과 나 또한 한 뿌리요 한 몸임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너 없이 나 없고, 타 존재가 내 존재의 지주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생명의 강, 민족의 젖줄이 영원히 흐르게 하소서.
인간의 탐욕 아래 고통 받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에게 용서를 구하게 하소서.”

(문규현 신부, 온누리 생명과 평화를 향한 기도문, 9월 4일 지리산)
 
또한 지난번 삼보일배로 갯벌의 중요성을 일깨웠지만, 그럼에도 팽팽한 논쟁 끝에 사업이 진행되던 새만금 간척지를 일부 권력자들은 기어이 동북아 두바이로 만들겠다고 하더니만, 벌써부터 미군은 간척으로 새로 만든 땅 일부를 이미 쇠 울타리를 치고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확장된 미군기지는 미국의 중국을 겨냥한 동아시아 패권전략을 수행하는 기지로 쓰일 것이다. 이에 맞서 중국의 미사일들은 새만금 미군기지로 향할 텐데, 이렇게 되면 새만금 간척지는 가장 위험한 땅이 되고 두바이는 물 건너가게 되는 셈이다. 우리 정부조차 이 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미군이 알아서 먼저 쓰다니 ‘죽 쑤어서 개 준 꼴’이다.
 
이번 오체투지 순례단은 이처럼 깊숙이 환경파괴에 걸터앉아 환경훼손 못지않게 한반도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주한미군에 대한 강력한 경고도 함께 하고 있다. 군산에 진지를 확장 구축하고 있는 미군의 무단 점령, 엎드려 땅에 대고 가는 길에 그들이 무단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는 모든 땅을 우리 국민이 돌려받겠다는 의지도 팍팍한 아스팔트 열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오체투지 순례를 출발하기 전, 황혼 무렵 새만금 간척지를 돌아보며 이 땅이 식민지라 하던 수경스님의 웃음은 순례단 모두의 가슴 속에 뜨겁게 남아 있다.
 
3. 오체투지 순례의 민족사적 의미
 
1)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담고
 
“남과 북이 본디 하나의 핏줄이고 민족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고통과 상처는 보듬고, 화해와 일치의 만남을 이어가게 하소서.
숱한 세월, 수많은 의인과 역사적 염원이 일구어온
민족통일의 의지와 희망이 단절되지 않게 하소서.
민족애와 평화통일을 향한 열망이
그 무슨 의혹과 장벽도, 시련도 난관도 이길 수 있게 하소서.”
(9. 4. 지리산 기도문, 문규현)
 
이미 문규현 신부는 89년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평양에 갔을 때, 사제로서 그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평양에 갔고, 그이를 데리고 38선을 넘어 오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의 죄로 복역을 한 바가 있다. 자유롭게 오가던 우리 민족 땅인데, 외세가 갈라놓고 서로 적으로 만들어서 오도가도 못 하게 그어 놓은 분단 철조망을 둘이서 뚫고서 내려온 지 벌써 20여년이 되었다.
 
그런 성직자가 참여하는 이번 오체투지 순례 역시 민족이 그토록 피눈물을 흘리며 염원하던 민족통일의 서원이 실려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단지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 행위인 오체투지를 하며 2009년에는 휴전선 분단장벽을 넘어 묘향산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온몸을 던져 민족분단사에서 헐어내야 할 남북 장벽, 정전협정 체제를 깨뜨리고 평화통일로 가고자 하는 성직자의 염원은 위의 지리산 기도문처럼 오체투지 시작전후 발표문 곳곳에서 드러난다.
 
더구나 이명박 정권은 6.15선언과 10.4선언으로 어렵게 쟁취한 민족 통일의 이정표마저 전면 부인하려 하고 있고, 국방부 장관이라는 자는 미국의 충견이 되다 못해 같은 민족끼리 민족절멸을 의미하는 ‘선제공격 가능성’마저 운운하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종교인의 양심은 어디에 서야 할 것인가?
 
계룡산을 거쳐 묘향산으로 향하는 두 성직자의 순례길 여정에는 조국통일의 절절한 염원이 땀과 눈물로 아로 새겨지고 있다.
 
2) 지난기간 민주화 운동세력의 자기반성
 
오체투지 순례는 그 동기가 이명박 정권의 횡포와 야만적인 탄압에서 시작되었다. 종교적 순례라는 형식으로 정권의 전횡에 저항하고, 탄압 받는 일반 국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더 낮게 상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성직자들이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이명박 정권, 역행 대보살이며 민간파쇼라고까지 통칭되는 현 권력상황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오늘 이처럼 민주주의를 20년, 30년 후퇴시킨 후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민주주의를 더 잘 가꾸고 지켜나갈 힘을 만들지 못한 우리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서 그 책임의 일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확보되었을 때 우리 민주화운동 세력은 그 의미와 질에 대해서 토론하고, 질 높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노력을 하는 대신에, 자만하고 민중을 깔로 보며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국민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그놈이 그놈’인 천박한 정치풍토의 하나로 이해하게 된 것이고, 이명박의 ‘경제 살리기’라는 거짓 구호에 표를 준 것이다.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 중 일부 정치권에 진출한 자들은 민중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했다. 말로는 시민의 힘과 민주주의를 이야기 했지만, 일반 민중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철저히 대상화시키며 오만불손한 채 기득권에 안주하다가 하루아침에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왕창 후퇴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싸움 어느 구석에 열린우리당 의원의 코빼기라도 보이던가? 평택 싸움 어느 구석에 민주당 나리들이 보이던가?
 
오체투지 순례는 더 낮게 온갖 더러움 다 싸안고 가라고 일러 준다. 더 낮게 대중을 주인으로 모시라는 이야기이다. 역사를 이끄는 동력은 자각된 민중의 힘이다. 민중이 자기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열어나가는 데 스스로 주인 되어 나서게 하기 위해, 더 낮아질 것도 없는 두 성직자가 몸을 던져 보여주는 저항과 사랑을 민주화운동 세력은 뼈 속 깊이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각급 운동 조직도 마찬가지로 오체투지 순례행위에 비추어 보며 더 낮아져야 한다. 더 낮고 겸손하게 대중 속으로 들어가며, 다 바쳐서 대중 스스로를 힘 있는 주인으로 만들 때만이 대중에게 신뢰와 원호를 받을 수 있다.
 
작은 이해관계를 앞세워 분열하기를 일삼아 오던 각종 운동 정파들은 사대매국세력의 파시즘 광풍 앞에 더더욱 초라하게 뒷전에 밀려 제대로 전선 한번 그어보지 못하고 있다. 겸손과 소박함, 그리고 온몸을 던지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용기까지 이 땅의 각급 운동과 정파 지도자들은 촛불과 오체투지 순례단의 정신을 본받아 가슴 속에 새길 일이다. 그럴 때 우리 사회에 제대로 희망의 싹이 솟을 수 있다.
 
3) 분단 민족사에서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에 대한 성찰
 
종교는 초월적, 내재적 성격을 보편적으로 가진다. 그렇지만 종교현상은 신앙을 갖는 인간들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해탈 등으로 표현되는 종교 경험이나 가치가 ‘지금 이곳’ 인간 삶의 현실과 일치시켜 추구했을 때 보편적 긍정성을 갖는다. 붓다의 자비나 예수의 사랑을 소외되고 힘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간의 역사과정을 보면 기성 종교가 기득권을 옹호하고 위안해주며, 민중을 철저히 외면하던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런 가진 자들을 위한 종교행위는 종교 내부에서 조차 끊임없이 비판받아 왔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가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분단된 민족사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종교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우리 종교는 구체적인 역사와 민중 속에서 ‘사랑실천’이라는 그 맡은 바 사명을 다할 때 시대와 민족의 참 종교가 될 수 있다.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일부 개신교는 철저히 사대매국의 입장에서 종교의 세를 불려왔으며, 최근까지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등 전쟁을 미화하며 살인, 약탈, 방화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심지어 국내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목회자들은 이명박 당선을 하느님 뜻이라 주장하며, 반북 대결의식을 고취시키고 철저히 미국에 예속된 현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른다.
 
시청 앞에서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이 반공 궐기대회를 할 때 대형 미국국기를 들고 나와서 시위를 벌였는데, 성조기에서 주를 뜻하는 별을 51개가 아닌 52개를 그려서 들고 나왔다고 한다. 교회에서 전파하는 예속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부 개신교의 이런 모습은 민중들에게 종교가 고통 받는 민중의 현실이나 역사를 외면하고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대착오적 패거리 집단이라는 인식을 강렬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다행히 종교적 실천이 가장 아름다운 보편적 인간애를 이루어가는 길임을 보여주는 두 성직자에게서 우리는 참 종교행위를 본다. 먼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땅의 가까운 이웃, 그것도 강도만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같이 아파하는 모습이 오늘 오체투지 순례의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민중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포악한 독재의 손에서 이 민족을 벗어나게 해 주소서’ 이런 기원과 실천 속에서는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마저 사라진다. 긴 세월 남에 의해 분단되어 고통 받고 있던 민족이 하나로 되어가자는 오체투지 발원에, 가슴 속에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자라면 애국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놓고 더불어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비록 종교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흐르는 애국, 애족, 애민의 뜨거운 사랑이 온누리에 넘쳐나고 동시대인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할진대, 여기에 참 사랑이 있고 신뢰가 있는 것이다. 
     
4. 오체투지 순례의 일정별 경로 분석
 
1) 지금까지 진행 경로, 곳곳의 애국적인 사람들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된 순례는 2008년 9월 17일 현재까지 겨우 구례를 지나 남원과 경계지역인 밤재 터널까지 도착하였다. 하루에 길어야 4킬로미터를 오체투지 고행으로 가다보니 진행이 많이 느린 편이다.

9월 4일 노고단 행사에는 100여명이 넘게 모여서 탐욕과 광기로부터 진리와 정의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 연민과 연대로 공생하게 해달라는 발원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비탈진 자갈 밭 길을 두 성직자가 오체투지하고 나머지는 뒤를 따라가며 반배를 하면서 ‘하늘이시여 이 민족과 민중의 아픈 삶을 어루만지소서!’하고 서원하였다.
 
7일째부터는 두 성직자가 구례지역 순례를 하며 아스팔트에 온몸을 납작 엎드려 오체투지를 하였고, 뒤 따라 가는 이들은 역시 반배를 하였으나, 간혹 오체투지를 따라 하는 이도 있었다.
 
가끔은 아주 먼 곳에서 찾아와 순례단에 합류하면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8일차, 9일차 순례를 예로 들어 보면, 인천의 요양시설인 효병원 ‘유무상통 마을’ 원장신부님과 직원들이 찾아와서 오체투지에 직접 참여하였다. 원장이신 방상복 신부님은 오체투지 순례와 함께 하기위해 5일째 단식 중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오체투지 절을 하면서도 많이 비틀거리고 있어 눈시울을 붉어지게 하였다. 또 목포대 어떤 교수는 토요일에 일가족이 함께 왔다며 종교인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오체투지를 함께 하고자 한다며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수경스님을 찾아보고 눈물짓는 불자들, 신부님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사람들 속에 숭고하고 선한 진정성이 보였다.
 
9월 17일에는 전남지역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집단으로 순례에 참여하였으며, 멀리 부산에서 이 민족의 희망을 찾고자 왔다며 일가족이 모두 봉고차로 구례까지 와서 오체투지 순례단에 합류한 경우도 있다. 9월 18일에는 남원 인근의 사찰 극락암 주지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였고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들, 애국적인 촛불 청년들이 함께 하였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곳곳에 애국적인 사람이 많다. 곳곳에서 찾아와 순례단 대열의 맨 뒤에 서는 사람들은 개인 삶의 문제도 간구하고 기도하겠지만, 크게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피 터지는 마음으로 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동지요,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 된다.
 
2) 11월 1일 계룡산 중악단까지 일정
 
2008년 9월 18일부터는 남원을 거쳐 임실, 완주 상관, 전주시, 봉동, 여산을 거쳐 계룡산 중악단에 11월 1일 도착할 예정이다.
 
전북지역 오체투지 순례 일정 속에서는 각 운동단체나 종교인들이 개인으로나 집단으로 동참할 것으로 보이며, 참여 조건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두 성직자가 온몸을 던지며 열어가는 길은 이 험악한 시대에 내내 희망과 위안의 메시지가 되어 삶을 긍정하게 하고 또 집단 희망을 일구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참된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의 서광이 한반도 전역을 비추며 퍼져나갈 것이다.
 
충남지역을 경유하는 때도 마찬가지이다. 양심적인 지식인과 종교인들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모여들 것이다.
 
“너희 파시스트들은 효율이고 실용을 앞세우냐? 우리는 느리고 누추하게 땅으로 간다. 그러나 기어이 간다.”
 
오체투지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저 오만방자하고 폭력적인 집권층의 전횡에 맞서는 ‘굼벵이 전략’으로 땅을 엎드려 가는 사람들, 그곳에는 생명이 보이고 평화가 보이기에, 새 희망의 서광이 보이고 참 사랑이 있기에 민중들의 진정한 신뢰와 지지를 받는다.
 
매일 가는 길은 조금씩 조금씩 가기 때문에 아주 적은 거리를 지나지만, 효율만을 앞세운 천박한 실용 장사꾼들이자 권력에 눈이 멀어 민중이 보이지 않는 안하무인격의 정권을, 앞뒤가 꽉 막혀 불통인 이명박 정권을 기필코 이겨낼 것이다. 이런 대장정의 과정에서 이미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아름다운 꽃이 천지간 사방에서 피어나고 있다.
 
3) 분단세력과 한판 싸움이 될 묘향산 가는 길
 
계룡산 중악단에서 서울까지 오체투지로 가는 여정은 순례 동행자나 국민들 사이에서 농민문제, 노동문제, 비정규직문제, 환경 문제, 교육 문제 등 다양한 의제들이 함께 표출될 것이고, 특히 촛불의 의미가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촛불의 단순성과 순수성은 어떤 형태로든 전 국민의 참여로 살아나야 한다.
 
반면에 촛불을 탄압했던 이명박 정권의 파쇼적 본질도 낱낱이 공개되어, 그 도덕성 상실 때문에 하늘 아래에서는 설 자리가 없게 되어야 한다. 이 순례의 중간 기착인 서울 즈음해서는 촛불의 요구처럼 이명박 정권을 아웃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심은 천심이고, 이 순례길이 민심을 대변하고 있기에, 하늘은 반성하지 못하고 역천하는 자를 매섭게 갈아치울 것이다.
 
국태민안을 빌며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묘향산 상악단까지 가자면, 휴전선 일대를 뚫고 지나야 한다. 하지만 휴전선 일대, 곧 휴전선에서 2㎞ 남측지역은 유엔사가 관리하는 지역으로서 한국이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하는 분단의 벨트이다.
 
필요에 따라 모자만 바꾸어 쓸 뿐, 남한에서 유엔사는 한미연합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분단에 기생하여 미군 기지와 작전권마저 틀어쥐고 있는 미국이 오체투지 순례단을 넘게 할리 만무하다. 그들은 그 분단선이 있음으로 남한에서 미군의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남한 내 친미사대 세력들도 분단선을 넘지 못하도록 총 공격에 나설 것이다. 그들은 북도 남과 같을 것이라는 논리적 근거 위에서 어리석은 치기 정도로 폄하하며 대중선동, 국가변란 등 분단시대 가학적 용어를 모두 동원하여 오체투지 순례단을 매도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보여준 그들의 행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체투지 순례단은 불통과 분단의 장벽을 기어이 넘어갈 것이다. 오체투지로 안 되면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서라도 넘어가려 할 것이다. 여기에 광범위한 남한 민중들의 열렬한 애호가 함께 할 것이며, 통일과 반통일의 치열한 전선이 형성될 것이다.
 
이 기간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합리적 의견들은 사회적 담론으로서 제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한반도의 영구한 평화를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이다.
 
또 작전지휘권이나 주한미군 주둔의 문제도 이제는 대한민국이 자주적인 자세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에 이 기간 집중적으로 제기될 것이다.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의 문제는 북을 아직도 적으로 간주하는 매카니즘의 문제이기에 묘향산을 향하여 오체투지로 순례를 하는 이 기간 충분히 사회적 담론으로 제공할 기회가 될 것이다.
 
5. 맺음말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200km, 천 리 길은 중국의 만 리 길, 대장정을 떠오르게 한다. 대장정이 중국 역사에 대반전을 가져왔듯이, 촛불과 촛불정신을 이어받은 오체투지도 우리 역사를 새롭게 할 것이다.
 
장구한 세월에 걸친 민중의 피눈물로 이룩한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한 순간에 되돌리려는 어둠과 악의 세력을 걷어내고 함께 사는 세상, 평화와 통일 세상을 열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가장 낮은 곳, 땅과 하나가 되었을 때 다름, 차이라는 것은 아무런 뜻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제 사람을 살리고 뭇 생명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길에 양심세력, 민주화운동세력이 하나가 되어 나서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도한 권력을 앞에 두고 선한세력, 양심세력은 모두 동지요 도반이다. 우리는 한 번도 불의한 권력의 억압과 횡포에 굴복한 적이 없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권력의 더러운 공격은 우리가 새로워지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이며,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바라보고 합의할 수 있는 목표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지금도 여전히 불씨를 안고 진화하고 있는 촛불 속에 풍부하게 녹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승자독식이 아니라 함께 사는 대한민국, 강대국에 빌붙어 자존심과 생존권을 팔아넘기는 비굴하고 사대하는 나라가 아닌 자주하고 존엄성 높은 나라, 대중이 소외되지 않고 생활과 운명의 주인으로 서는 나라, 노동의 대가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나라, 청소년들이 입시지옥에서 해방되어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공공성을 사유화 하지 않는 나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나라, 나이와 성과 종교와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는 나라….
 
100만 촛불 시민들은 이런 나라를 간절히 염원하지 않았을까?
 
분열은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민중과 정의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대신 욕심과 비굴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성, 자주권, 환경권, 평등권, 평화와 통일이라는 가치에 동의하는 모든 사람과 세력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민주화, 진보 운동가들은 알량한 과실을 내 손에 움켜쥐려하기보다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대중 속에 녹아 들어가 약한 이웃의 벗이 되고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멀리 바라보면서 더딜지라도 대중 속에서 믿음과 희망을 쌓아갈 때, 촛불의 꿈을 마침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촛불과 오체투지는 밖을 향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낡고 옹졸한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라는 뜨거운 호소이기도 하다.
하나 되어 대중 속으로 들어가자!!
 
▲\'6.10 고시철회 즉각 재협상, 국민무시 이명박 정권 심판 100만 촛불 대행진\'에 참가한 서울 시민들.     © 장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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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흙 08/09/25 [15:02]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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