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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매카시 광풍 바로 잡는 재판부를 기대한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김형근 교사 2차 모두진술서
기사입력: 2008/04/01 [15:5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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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2시, 전주 법원 제3호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김형근 교사의 2차 재판이 열렸다. 김형근 교사의 모두진술서를 전재한다.

지난 3월 12일 첫 공판에서 모두진술서를 작성했는데, 그날은 기회가 되지 않아 이번에 제1차 모두진술서에 이어 2차모두진술서를 제출합니다.

재판장님!
사람은 누구에게나 살아온 삶의 여정이 있고 오늘 삶과 행동 속에는 그 역사가 묻어나게 됩니다. 저는 1978년 일인 독재파쇼체제였던 유신 철권통치의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유신체제는 사회를 하나의 커다란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국민들의 기본권은 물론 삼권분립과 의회민주주의제도, 또 복수정당제도 조차도 아예 무시해버린 오로지 일인만을 위한 장기집권체제였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일어났던 일이 동일방직사건이었습니다. 살인적인 최저임금을 받던 여공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일어서자 경찰과 관리자들이 합세하여 여공들에게 인분(똥)을 퍼붓고 폭력으로 철저히 짓밟았던 대표적인 노동탄압이었습니다. 종교 인권단체 등을 통하여 이 사건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사람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권리와 존엄성마저 뭉개버린 이런 일에 누구든 관심을 쓰면 빨갱이라는 의심을 받고 심지어 잡혀가기도 하기 때문에 알아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탄압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교정에 경찰이 몇 개 중대씩 주둔을 하며 교내행진하면서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있다하면 예비검속으로 학생대표들은 그냥 그들의 장소(전북대는 학생회관 지하)에 불려가 치도곤을 당하곤 했습니다. 가히 유신말기 발악적 지배를 눈에 보며 학교를 다닌 것 이지요.

1979년 제가 시험을 보던 중에 형사20~30명이 시험장에 난입해 들어와 저를 짓이기고 수갑을 채워 끌고 갔습니다. 시위를 하기로 했다가 취소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그들의 코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의 죄는 파쇼 통치가 어서 끝나기를 기도 했고 미국식 민주주의인 자유와 인권을 선망한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실제적 정권을 장악한 80년 봄은 전국에서 거대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 해부터 수배 중이었던 저는 다시 새 학기에 학생운동대열에 앞장섰고 전두환에 의해 계엄 확대가 실시되자 또 다시 수배되어 쫓겨 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참혹한 광주학살이 벌어졌고 그 시대를 살던 저는 울분과 좌절 그리고 저항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남한정세가 불안하다고 미국에서는 항공모함을 부산에 급파했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이 인권의 나라이기 때문에 광주시민을 도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전두환을 지원하였고 거기 힘입은 전두환은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살육전을 벌였으며 전국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이후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라는 사람은 “한국국민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통치를 해도 잘 따라가게 되어있다”며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했습니다.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자기 잇속이나 중요하지 한국 민중들의 애타는 민주화 열망과 피 흘림을 안중에나 두었겠습니까? 제가 착각을 한 것이지요.

하여튼 저는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여기저기 돌리고 다니다가 늦게 체포되어 군 헌병대 영창에 몇 달 수감되어 있다가 군대로 강제징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도 보안사 요원들이 빨간 것을 파랗게 만든다고 녹화교육을 시키지 않나, 시시때때로 무슨 수사인가를 받게 하지 않나 하면서 몇 개월씩 보안대에 끌려가 짓이겨지곤 하였습니다.

보안대에서는 말이 수사이지 그냥 무식한 폭력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제대를 하여 복교조치가 있은 다음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곧 퇴학을 당하고 다시 복교를 하고 반복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1985년은 한 해 동안 경찰서에 끌려간 것 만 10여 차례가 넘습니다.

제가 이렇게 삶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저의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부모님들께서는 80년 당시 제가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만이라도 알자고 35사단 정문 앞에서 노숙을 하며 계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때까지 친구로 지내던 최낙도 의원에게 아들의 생사를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가 폭도 아들을 두었다며 거절당하자 한 동안 친구관계를 끊고 계셨습니다.

제가 수배 되었을 때도 일 계급 특진에 눈이 먼 형사들이나 군부대 수사관계자들이 시골집에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와 저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군화발인 채로 방에 들어와 온 집을 다 뒤집어놓곤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놈들은 부모님에게 더러운 욕을 내뱉고 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살림살이를 다 내 던지는 바람에 방마다 난장판이 되어서 어머님께서는 그들이 떠난 뒤에 너무 서러워 땅바닥 댓돌에 주저앉아 대성통곡 하시기를 반복했다 합니다. 지난번 재판정에서 “이놈들아!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가두었느냐?” 라고 절규하신 어머님의 삶의 모습의 압축적인 한 표현이었습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저에게 국가 유공자 신청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늦게나마 보상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다친 사람, 그때 그 일로 힘들게 되었던 정말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차마 보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같이 죽지 못하고 비겁하게 살아 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가장 컸겠지요. 이 부분은 이 한마디면 충분히 짐작 하실 것 같아 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때 어머님께서 ‘내 가슴에 맺힌 한이라도 풀리게 보상을 받아라. 보상으로 그토록 분하고 억울했던 세월이 풀어지겠냐 만은 그래도 내 아들이 국가유공자를 받는 모습을 보아야 쓰것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질게도 5차례 이상 계속되었던 보상신청에 끝까지 접수하지 못하고 보상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이렇게 구속되어 있습니다. 풀어 주었다 또 가두고 국가유공자로 보훈처에 신고하라고 했다가 또 잡아 가두고.... 항상 꽃 잔디길 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자식을 50살 먹도록 바라보고 있는 칠순 노모의 마음이야 오직 안타깝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가정 깊숙이 묻어있는 상흔 속에서 어머님 가슴속 오열이었습니다. ‘야 이놈들아!...무슨 죄가 있다고...’

재판장님!
80년 5월 이후 저의 삶은 살아 남은자로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시대적 진실과 일치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5월 항쟁 동지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재판에 보다 큰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공소 내용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소장 첫머리 전과부분은 민주화운동으로 보상 받아야 할 부분이지 누범임을 증명할 내용은 아닙니다.
 
저는 86년 전라북도 민주화운동 협의회라는 운동단체에서 집행부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86년 4월 말 전주교육청 큰 사거리에서 전두환을 규탄하는 시위를 주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 이 자리 방청석에 와계신 박종훈 참여연대 상임대표와 이광철 의원 그리고 저까지 3명이 현상금 천 만 원에 일계급 특진을 걸고 전국에 지명 수배 당했습니다. 경찰들이 혈안이 되어 날 뛴 것은 물론이고 애꿎은 저의 부모님들은 또 한바탕 기관원들에 의해 닦달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때 도피 중에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의 내용이 공소장 첫 머리에 올라와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 말기 야만적 폭력이 횡행하던 때, 그 때 저항을 하며 항거를 했고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1987년 재판 결과 내용이 공소장 첫 줄부터 적혀 있다는 사실에 제가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아마 검찰 측에서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유도하도록 적어 놓은 작위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차라리 몰랐던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저의 이런 전과는 이미 국회에서 6월 항쟁과 관련 민주화운동보상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저에게 또 다시 보상신청을 해야 하는지 갈등을 준 국가 유공내용이지 범죄사실의 모두에 적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자유를 위해 군부독재정권과 목숨을 건 싸움의 진행된 내용 그 역사적인 과정을 놓고 누범의 징표로 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자들의 집단적 죄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목이 된다면 전국의 6월 항쟁의 동지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뒤집어 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법적인 명예회복이라는 구체적인 사실의 뒷받침이 아니더라도, 민주주의가 압살 되었던 시절, 일인 지배와 자의적 지배 그리고 초법적 폭력이 판을 치던 시절 여기에 저항해서 맞서 싸운 것이 민주시민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로서 후세에 귀한 모범으로 남을 내용이지 탄압과 구속의 방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검찰에게 국가보안법은, 앞서 말한 고귀한 피 흘림과 숱한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가치조차도  무차별적으로 그 혐의의 대상으로 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하나 자료와 증인들을 모셔다가 사실관계를 다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 자리에는 맨 처음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를 만드셨던 산파 역할의 문규현 신부님도 와 계시고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박종훈 참여연대 상임대표를 비롯, 다수의 관계자들이 방청하고 계십니다. 원하신다면 즉석에서 증인을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모르고 집어넣었다면 지금 당장 공소내용에서 이 부분을 빼 주십시오.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더 이상 이적 단체로 될 수가 없습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란 단체는 남측 재야운동단체에서 공동으로 먼저 제안하고 북측과 해외가 이를 받아들여서 결성한 남북해외 우리 민족 3자연대의 민간급 통일운동기구입니다.

이 단체는 일방적인 북의 이념이 아니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7,4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내용을 자기 강령으로 삼고 있습니다. 비록 연방제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고 하나 그것이 적화통일로 등시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북 양 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을 하는 방안으로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의 합리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통일방안이었습니다.

더구나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범민련 통일방안은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 제안의공통성’을 지향하는 제2항과 똑같이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도 범민련 남측본부의 구성은 특별히 이적성을 띤 결사조직이 아니라 남한 내 운동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체제를 갖춘 통일운동조직입니다.

현재 남측본부 의장이신 이규재 의장님도 전국빈민운동연합대표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입장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범민련남측본부입니다. 다만 초기에 이 단체가 정부와 마찰이 있었고 이 마찰과정에서 이적단체라는 레테르를 부여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범민련은 해마다 8월15일 범민족대회를 치르는데 남북 해외의 3자연대이기 때문에 의장단의 공동선언 등이 나오기 위해서는 해외를 통한 펙시밀리 전송의 방법으로 회의를 해야 했고, 이것이 국가보안법상 회합 통신 죄에 해당한다는 정부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6.15시대입니다.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전제는 북이 반국가단체여야 하는데 6.15시대에는 북이 평화통일의 동반자이자 공동주체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범민련은 이적단체로 될 수가 없습니다.

남과 북이 각각 법체계를 가지고 있고, UN에 국가로 각각 가입해 있으며, 국제법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K)이란 명칭으로 독립국가 형태로 인정받고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북이 남한법의 효력이 미치는 반국가단체가 될 수 없음은 명확합니다. 또 7.4공동선언에서부터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10.4선언 등 남과 북이 공동으로 합의한 규범들도 더 이상 북을 반국가단체로 보지 않습니다.
 
현실 또한 범민련 남측본부는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사무실을 내고 있고, 범민련 남측본주이름으로 정부 민간이 함께 주도하는 통일행사에 참여를 하고, 합법적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측 통일운동의 지도구심으로 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 대학교 학생회장 등 대표들로 이루어진 한총련과 마찬가지로, 각 운동 단체의 대표들로 중심이 꾸려진 범민련 남측본부 또한 이적단체로 될 수가 없습니다.

설령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그런 규정성은 이전 판단이기 때문에 재판부에서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범민련 남측본부의 활동이 모두 이적활동이란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당시 전북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9월 말경 구속이 되어 생업의 터전이 파괴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재판이 미루어져 96년 초에 심리가 열렸는데, 저는 심리과정에서 저의 고통스러운 처지와 격무에 시달리는 판사님을 깊이 배려하여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고, ‘다른 것은 인정을 못하지만, 범민련 남측본부 가입부분은 인정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재판부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저는 집행유예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속기록에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후 저는 사면이 되어 교사로 임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소장에서 검찰이 그 때의 공소장 앞부분을 그대로 베껴놓음으로서(p4위8줄~p5위6줄) ‘반성하지 않고’ 증거로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한번 처벌받은 내용을, 그것도 완전히 사면되어 회복된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그대로 공소사실에 다시 베껴놓아 그릇된 판단이 유도된다면, 이 재판의 공명정대함과 객관성은 심각하게 훼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검찰에서는 범민련에 대한 판단 부분과 저의 예서 공소장을 베낀 부분을 빼주시길 정식으로 부탁합니다.

6.15민족공동위원회 역시 그 누가 훼손할 수 없는 남과 북의 민관합동 통일기구입니다.

남과 북이 6.15공동선언을 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하는데, 주최가 필요했고 그것이 6.15남북공동 행사준비 위원회 성격으로 있다가, 6.15민족공동위원회로 정식 명칭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기에 정부에서 나서서 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민관합동의 전 민족적 통일 연대기구로서, 6.16남북공동선언을 잘 실천해나가자는 취지의 상설적 단체입니다.

얼마 전에는 아주 낮은 형태의 공동 규약까지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임대표로 백낙청 씨가 선임되어 있는데, 이분은 서울대 교수였던 분으로 창작과 비평사 사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북의 대남전략의 일환 어쩌고 해버리면 어떡합니까?

북에서 이를 확대 강화하자고 했다고 해서 6.15민족공동위원회가 대남적화통일의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 매도 될 수는 없습니다. 남측에서도 통일부를 중심으로 관에서 지원하고 있었고, 각계 각층의 운동단체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를 확대강화하자고 했습니다.

6.15공동선언의 내용으로 보아도 통일을 위한 민족기구가 형성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6.15남북 공동선언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6.15민족공동위원회를 강화하자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저 또한 그 방향의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북에 추종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의 심각한 왜곡입니다.

제가 통일산악회나 통일교사모임 등 단체가 잘 꾸려지면, 장기적으로 6.15민족공동위원회 산하로 할 필요가 있다고 교육청 제출 자료 등에 문건으로 명시한 것은, 북 선전에 동조한 것이 아니고, 그쪽 의도와 상관없이 주장한 내용입니다. 실제에 있어서도 6.15민족공동위원회 남측본부, 그것도 전북본부를 염두에 두고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저의 생활영역이 전북이고, 소속된 회원들도 모두 전북사람들이기에 쉽게 전북본부 산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은 6.15민족공동위원회 전북본부 상임대표인 이강실 목사와 누차에 걸쳐 상의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검찰 측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에 대해서 편협한 생각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6.15민족공동위원회 남측본부 여러 관계자 분들을 모셔 와서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만약 정확히 이해가 되었다면, 이 부분 (p3밑8줄~p4위두줄)도 공소장 모두 부분에서 제외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이외에도 공소장 모두(冒頭) 부분에서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경우 모두 삭제해 주시거나, 아니면 구체적 공소항목으로 바꾸어 하나씩 진위여부를 가려야 합니다.
 
공소장에서 이하(p5위9줄~p12위5줄) 모두 부분은 제가 경찰과 검찰에게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았던 부분이었고, 영장실질 심사나 구속적부심 때 구체적 범죄사실로 항목이 잡혀 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소항목이 아니라 모두 부분에 싸잡아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바뀐 부분을 놓고 교묘하게 조작을 하고 있다거나 살짝 피해가려는 의도라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난번 검찰의 기소요지 발표에도 이 부분은 빠지고 공소항목 1번부터 제기한 사실이 있음을 볼 때, 범죄사실을 다투지는 않되 범죄의 일부분으로 간주되며, 저에게 불리한 채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공소사실로 전환해서 질의응답을 하도록 바랍니다.

싸잡아서 들어간 부분은 모두 12항목으로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통일과 반미 자주화에 대한 저의 인식부분(p5 위9줄~13줄)
 ②학생들을 의식화 조직화했다는 부분(~p6 위8줄)
 ③인터넷 카페에서 활동을 했다는 부분(~p7 위3줄)
 ④수업이나 시험 등으로 학생들을 친북반미의식화 했다는 점(~p7위11줄)
 ⑤미국의 이라크 침략 시 학생들이 반전 버튼 운동을 하게 했다는 점 (~p8위 2줄)
 ⑥북한 학생들에게 편지쓰기를 하게 했다는 점(~p8밑3줄)
 ⑦학생들에게 6.15공동선언을 외우게 하고 한자시간에 조국통일, 민족공조를 가르쳤다는 점(~p9위6줄)
 ⑧학생회 표어로 등장한 국가보안법 폐지와 미국반대, 그리고 우리 민족끼리 이념을 전파시켰다는 부분(~p9밑5줄)
 ⑨일일이성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p10위2줄)
 ⑩통일 산악회를 결성하고 활동한 사실(~p10밑5줄)
 ⑪고등학교 학생들의 통일 화랑대 건설(~p11위2줄)
 ⑫교사들이 통일교사모임을 결성, 의식화시켜 친북 반미적 통일운동의 확산을 도모했다는 내용 등입니다.

쓰지 않았다면 몰라도 공소사실 모두 부분에 기재되었기 때문에, 하나씩 진위를 가릴 수 있도록 이 부분을 공소항목에 넣어 낱낱의 사실을 질문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는 이에 대한 자료나 개개의 항목마다 증인을 신청할 것인 바, 그냥 넘어가지 말고 하나씩 범죄사실을 확인하는 검찰의 명확한 태도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부분이 범죄가 아니라면, 전체를 공소사실에서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가상공간(cyber space)마저 국가보안법으로 막아 나서려 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가상공간은 컴퓨터 디지털 부호인 ‘0’과‘1’의 체계로 구성된 시뮬레이션의 세계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지역적 인종적 구별이나 나이, 성별, 지위고하를 뛰어넘어 서로 대등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참여가 가능한 놀이형식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 간 인위적 경계가 허물어진 유목민 같이 자유로운 이 영역에서, 낡은 냉전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어 제한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이미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은 이 가상공간은 무한한 발상과 창의력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되기는 하되, 비실제적인 영역입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성인용 음란 사이트처럼, 바로 이 영역이 갖는 몇 가지 특성, 누구든 쉽게 접속이 가능하고, 정보를 이전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한 특성, 놀이적 특성들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고 처벌할 수 있는 세계유일의 악법이라고 할지라도, 그 목적 판단의 주체가 임의적이어서 인간의 최소 기본적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는 반인권적 악법이라 할지라도, 그 적용에서 판단의 근거들은 객관적 실재에서 확보되어야 절차적 형식이라도 충족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실제적 영역, 컴퓨터 까페 등 가상의 세계에서 그 증거를 찾아 국가보안법 위반의 객관자료로 삼겠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교육자인 저야 현실세계에서는 시공제한으로 불가능했던 영역에, 새로운 맥락적 수업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장치를 생성하기도 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스스로 현실의 절망과 좌절들을 인터넷을 통해 문제 해결을 하려했고, 또 이곳에서 학생들은 창의력을 보이며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매개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질 높은 발전 수준을 보이고 있는 데야, 교사로서 이런 조건을 방치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카페라는 공간에서 단지 교육적 관찰과 지나치지 않도록 자제시키는 등 배려만을 해왔습니다. 물론 대화의 참여자 역할도 해왔습니다. 학생들에게 카페는 자유로운 놀이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토해지는 학생들의 글은 쉽게 생겼다가 꺼지기도 하는 즉자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를 주는 글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학부모들도 참가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이런 사이버공간에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먹이를 낚고 있었다면, 그것 또 분단시대 못난 어른들의 자화상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과거 편린과 공소장 모두부분에 은폐되어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외에도 본 공소장은 억지로 맞추다 보니 엉성해져서 다대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제는 즉각 제기를 하겠습니다.

지난 1차 공판은 관련 자료가 16,000쪽이나 되어 검찰 측에서 변호인 측에게 다 제출하지도 못한 상태여서 빨리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자료의 방대함을 보면서 저는 ‘죄가 없으니까 숨 쉬는 것까지 혐의를 잡으려고 그렇게 많은 것 같다’며 면회 온 지인에게 씁쓸히 웃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든 자료만 보아도 질리겠지만, 그 내용들은 별 거 아닙니다. 그 대부분은 쉽게 싸이트 에서 취득한 것이나, 제 생각을 어떤 목적성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기 위하여, 북의 자료를 그대로 카피해서 제출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제 하나씩 밝히다보면 검찰이 이번 사건에서 얼마나 무리수를 두고 있는지 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대로 필요하다면 차곡차곡 반미의 문제, 장기수를 보는 관점, 국가보안법의 문제 등 하나씩 집중적으로 저의 입장과 진실을 밝혀드리겠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비록 이렇게 억측과 무리로 제가 구속된 상태에서 시작한 재판이지만, 6.15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통일의 역사적 성과물들, 즉 분단 역사 속에서 피 흘리며 하나씩 성취되어온 통일 노력들과 민족의 내일 겨레의 운명문제가 이 재판에서도 치열하게 결려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고, 본건의 국가보안법 위반여부를 공정한 눈으로 냉정하게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이번 재판이, 지금까지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한생을 정의의 길로만 올곧게 살아온 저에게 무슨 사상가로 몰아세우는 억지가 통하지 않게 하시고, 또 저 하나 희생시키기 위해 어린 학생들의 작은 눈물 꽃 같은 활동마저 빨갛게 색을 칠해버린 어처구니없는 반공 메카시즘의 현실을 바로 잡는 데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3월 28일 상기진술자 : 피고인 김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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