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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여론
강상기 시인이 들려주는 '나의 삶, 나의 문학'
강상기 시인이 전북문학관 특별강연에서 밝힌 '오송회사건'의 진실
기사입력: 2019/05/09 [00:0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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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기 시인이 3일 전북문학관(관장 류희옥) 강당에서 '나의 삶, 나의 문학'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람일보


강상기 시인은 5월3일 오후 2시 전북문학관(관장 류희옥) 강당에서 김광원 학예사의 사회로 진행된 '나의 삶, 나의 문학'을 주제로 한 '5월 문학광장' 특별강연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오송회사건' 5공 이적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의 진실을 밝혔다. 강 시인은 이날 우리 시대 문학의 사명과 관련해 "작가들은 개인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분단극복과 조국통일을 추동하는 문학을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전북문학관 강연장에서 배포된 강상기 시인이 기록한 '오송회를 말하다' 글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 ‘오송회’를 말하다>

                                     

어느 독재자의 끝과 서울의 봄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걸친 기간 동안 나는 주택개발업자가 지은 익산시 영등동 535-26 단독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결혼하여 첫딸과 둘째 딸을 낳아 기른 곳입니다. 봄이면 작은 마당에는 철쭉을 비롯하여 꽃 잔디가 참 아름답고 담장 옆으로는 장미가 붉었습니다. 여름에는 큰 플라스틱함지박을 마당에 내어놓고 거기에 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어린 두 딸아이가 물장난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는 발코니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두 딸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엄혹한 독재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딸들이 티 없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만큼은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당시 익산 원광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몹시 기뻐서 날을 새며 술을 마셨습니다. 유신독재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끝내 그는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그의 대갈통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부시지 않고는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었다  돈을 좀  벌어온다고 집안에 들면 포악한 가장처럼 그는 경제를 내세워 포악한 정치를 했다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독재자의 친구는 목숨을 건 결심을 했다 시저를 죽인 부루터스처럼 친구는 영웅답게 행동했다 독재자의 탱크 앞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수백 만 명의 희생을 미리 막은 의인이었다  독재자의 죽음 옆에는 허망한 권력처럼 씨바스가 제 멋대로 나자빠져 있었다.
                                            - 졸시 「어느 독재자의 끝」

 

1980년 잔뜩 부풀었던 민주화의 봄을 맞아 나는 교권옹호위원회를 결성해 교육정상화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 이유로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하여 원광여자고등학교에서 그해 11월에 강제해직되었습니다. 나는 상경하여 문학평론가 임중빈씨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출판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아내와 어린 두 딸과 헤어져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근무가 가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만두고 1981년 봄, 군산제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군산에서 익산까지 통근할 수 있는 스쿨버스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스쿨버스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제일고등학교는 군산의 명문학교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 학생들의 장래를 위하여 나는 진학지도 실에서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82년 11월 3일, 저녁 12시경에 익산경찰서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좀 알아볼 일이 있으니 경찰서 정보과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 줄 모르고 경찰서에 나갔는데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책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 책을 주었다고 하는 사람이 여기에 와 있다고 하면서 정말 모르냐고 윽박질러서 그렇다면 그 사람과 대질해달라고 말했더니 뜻밖에도 이 광웅 시인이 나타났습니다. 대질 끝에 내가 받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대신 김 지하 시집 『불귀』를 내가 소지하고 있다고 하여 압수당하였습니다. 『불귀』는 일본에서 간행된 것인데 문규현 신부가 가지고 있던 것을 복사해서 소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오후 그러니까  82년 11월 4일, 수업도중 군산경찰서 정보과 문형사에 의하여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문형사는 중학교 동창으로서 중학교시절 농구선수를 했습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중학교 동창한테  연행되다니! 참 얄궂은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처음에는 나를 몰라보다가 내가 혹시... 하면서 물어보니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런 일로 만나니 괴롭구만"이라고 말하면서 미안해했습니다. 군산경찰서까지 나를 데리고 간 그 친구는 "조사 잘 받아!"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시집 『병든 서울』이 몰고온 파장

 

군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저녁 8시경에 전북 대공 분실로 끌려갔습니다. 처음에는 대공 분실 사무실에 나를 2시간 정도 혼자 있게 하였는데 그 고요함이 오히려 공포였습니다. 나중에 형사 한사람이 들어와서 대뜸 큰소리로 호통을 치면서 베트남이 왜 망했느냐? 장개석이 왜 모택동한테 패배했느냐? 등을 물으면서 무슨 독서클럽이 있다는데 다 내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평생진술서를 쓰라면서 갱지 한 묶음을 책상 위에 던져 놓고 나갔습니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새워 진술서를 썼습니다.

다음 날 나는 대공 분실 맞은편에 있는 무주여인숙으로 끌려갔습니다. 나에게는 담당형사가 붙었습니다. 나에게 평생진술서를 쓰라고 한 바로 그 형사였습니다. 목소리는 우렁우렁했으며 얼굴은 위협적이었습니다. 이광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쓰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무실도 따로 쓰고, 익산에서 군산으로 통근하는 관계로 자리를 함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더니 그래도 국어선생끼리 왜 이야기가 없었겠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해? 들어온 이상은 그냥은 못나간다면서 그전에 고문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순순히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듣지 못한 말을  하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들은 말이 없다고 했더니 고문기술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첫인상이 고약하게 생겼습니다. 눈자위에 칼자국 같은 흉터가 잔인하게 보였습니다. “너는 뜨거운 맛을 봐야 불거냐”면서 무슨 말이든지 들은 것이 있으면 적어내라고 협박해서 전두환이 미국 방문 중 차를 시키는데 영어로 “아이 엠 커피”라고 말했고, 또 전두환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는데 이유는 대통령이 되어 기쁜 나머지 이순자가 “여보, 이게 꿈이여 생시여”하면서 허벅지를 쥐어뜯어서 그랬다는 등의 말을 적었습니다. “이 자식, 안 되겠구만” 하더니 나를 대공 분실로 끌고 갔습니다. 사무실에서 다른 형사 한 사람을 부르더니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갔습니다.

옷을 다 벗으라고 하더니 두 팔목을 노끈으로 묶고 무릎에 깍지를 끼게 하더니 쇠파이프를 무릎 아래쪽에 집어넣어 테이블 양쪽에 걸쳐 놓고 고문을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주전자의 물을 부어댔습니다. 사타구니에도 찬물을 부어대면서 “좃도 아니구만”이라고 중얼대면서 킥킥거렸습니다. "우리보다 월급도 많은데 웬 불평을 그렇게 했느냐? 전두환이가 광주에서 만행을 저지른 것을 나도 분개한다. 그러나 나도 살아야 한다.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 어서 빨리 하나 내 놓아라. 독서 서클이 있다면서?” "없습니다." "이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 혀! 안되겠구먼!" 마침내 양쪽 엄지손가락에 전선줄을 감아 전기고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공 분실에 불법구금 당한 채  20여 일 동안 가혹한 고문에 의한 강압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과정에서 당한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인하여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혹독한 고문에서 오는 심한 강박관념과 공포 상태는 나를 정신적 혼미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건은 조작되어 82년 11월25일 나는 구속되었습니다.

그때를 다시 뒤돌아보면 '오송회' 사건은 한 권의 시집 때문이었습니다. 오장환 시인이 쓴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은 신석정 시인 집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를 필사해 이광웅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집을 동료교사들과 나눠보기 위해 다시 복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복사본을 박정석이 가지고 있었는데 집에 놀러온 서울대 제자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그 제자가 술에 취해 버스에 놓고 내렸습니다.  전주 직행버스 주식회사 소속 버스 승객 점검원인 전모씨가 1982년 7월20일 군산시 장미동 소재 시외버스 터미널에 정차된 버스 안에서 승차인원을 점검하다가 『병든 서울』복사본을 습득하여 군산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군산경찰서는 당시 용공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던 위 시집의 출처를 수사하게 되었습니다.

복사본 표지는 제일고등학교 상장을 사용했기 때문에 쉽게 출처가 드러났고, 이광웅의 독특한 글씨체도 바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이광웅이 복사본을 동료교사에게 배포한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군산경찰서는 상부기관인 전북도경 대공분실에 이를 보고하였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대공경찰은 43일 동안 교사들에게 북한과의 연계 여부, 광주항쟁의 중심인물인 윤한봉과의 관계를 추궁하며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 등으로 위협한 끝에 '오송회'라는 이적단체를 조작해 발표했습니다.

사실 오송회라는 이름은 당국에서 지어준 것입니다. 82년 4월19일 교사 5명이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서 4.19혁명이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며 막걸리를 마시고 4.19와 5.18희생자를 위해 묵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를 빌미로 해서 수사기관에서는 맨 처음 '오성회'로 만들었습니다. 익산남성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참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명이 남성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바꿨는데 소나무 아래에서 위령제를 지냈다고 해서 '오송회'가 된 것입니다.

나는 전주북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에 와 보니 그 지독한 대공 분실이 차라리 따뜻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다 앞문과 뒷문이 모두 유리창도 없는 철창이어서 마치 동물우리와 같았습니다. 겨울바람이 몹시 불어서 담요 한 장 가지고 체온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가혹했습니다. 더구나 모진 고문으로 인해서 내 손가락과 종아리 쪽이 심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는데 담당경찰관에게 물파스를 구해달라고 해서 바르며 지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변호사를 통해서 상처 부위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채증도 해야 할 일을 나는 그 상처의 흔적을 없애고 있었습니다.

너무 춥고 몸의 통증이 심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개 떨듯이 떨며 지냈습니다. 소변을 보면 붉게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습니다. 허리가 몹시 아파 일어나 몸을 움직이면 담당경찰관이 앉으라고 제지하였습니다. 너무 추워서 그런다고 하면 카메라로 유치장을 감시하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안부가 궁금했던 이광웅 시인도 바로 내가 있는 옆방에 있었습니다. “형! 어떻게 된 거여?” “다 조작한 거여! 전부 내가 뒤집어 쓴 거여!” 이때 나는 실체가 없는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하루 종일 대화 없이 무료하게 지내는 일은 더욱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언제 검찰에 불려갈지 모르고 또 언제 대공 분실에 다시 불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담당경찰은 나에게 『정화』라는 잡지를 읽어보라고 주었습니다. 정화추진위원회 본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였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의 글도 실려 있었는데 군사정권에 온갖 아첨을 떠는 구역질나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정화시켜야할 잡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도중 문득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이 생각났습니다. 내일이면 82년 12월 5일. 우리의 6주년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내 생각을 어떻게 아내에게 알릴까 궁리했습니다. 나는 밥 한 숟갈을 몰래 남겨 놓았다가 『정화』잡지의 활자를 찢어서 새 내의를 넣어줄 때 묻혀 들어온 종이에 붙였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고야(아내의 본명은 최승희이지만 최고야는 내가 지어 부르는 이름이다.)
오늘은 우리의 6주년 결혼기념일에요. 함께 있었으면 언제나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6년 결혼생활을 돌이켜 봅니다. 어깨를 쫙 펴세요. 결코 위축되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하나로 짝 지어 주실 땐 좋은 일, 궂은 일 함께 도우며 지내라는 것 아녜요? 암, 그렇구 말구요. 인간이 떳떳이 어깨 펴고 사는 길은 결코 호화로운 주택에서 호의호식하는 일은 아닐 거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양심의 평화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궁핍은 견딜 수 있어요.

 

그 종이쪽지를 헌 내의 속에 집어넣었는데 다행히 내의를 빨기 위해 옷을 뒤집어 보던 아내가 그 쪽지를 받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나의 내의에서 풍기는 파스냄새를 맡으며 그 편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눈시울을 붉히면서…….

고문 수사로 국가범죄의 희생양이 되다

 

유치장 생활 19일이 되는 82년 12월13일 검찰에 송치되어 전주교도소로 넘어갔습니다. 다시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문 수사의 강압에 의한 경찰조서가  검찰에서는 제대로 밝혀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심문 과정에서 나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나는 재판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검찰이 요구하는 대로 자포자기 심정으로 답했습니다. 또 어떤 가혹행위가 있을까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했습니다. 검찰조서 작성 시 수사 경찰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판사가 말하길 검찰조서가 증거가 된다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절망했습니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사법부에 대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함께 가자고 했던 사촌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에 남아 끝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고집하여 사촌과 함께 이민 가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국가범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원통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의 번호 2129번은 0.8평짜리 독방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룻바닥이었으며 문은 비닐로 막아 있었습니다. 유치장보다 따뜻해서 좋았습니다. 두꺼운 푸른 색 솜이불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잠을 자고 나면 솜이불이 물에 적신 듯 축축했습니다.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에 허리가 아파 겨우 일어나곤 했는데 감기까지 걸려 심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의무실에 가서 주사를 맞았는데 혈관이 찢어져 팔뚝이 먹빛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나를 담당하는 교도관은 알고 보니 고등학교 후배였습니다. 그 교도관이 나를 생각해서 그렇다면서 천주교 정의평화 위원회 소속 이돈명, 황인철 변호사 선임과 면담을 방해했습니다. 오히려 그 쪽을 선임하면 결과가 더 나빠질 것이니 아예 면담하지 말라고 해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공판이 열리기 전에는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바깥소식이 궁금했습니다. 그 때 아내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나는 이 구절로 미루어 결혼기념일에 유치장에서 내가 몰래 보낸 쪽지를 아내가 받은 줄 알았다)으로 두 딸애와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천진스럽게 잠든 딸애들의 얼굴에서 당신의 따사로운 사랑을 느낍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면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드립니다. 고통 뒤엔 반드시 행복이 있고, 사랑은 받는 것보다 줄 때가 즐겁다는 말을 되새겨 보며, 평소에 사랑을 줄줄 몰랐던 나 자신을 책망하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그 생활에 익숙해 있는지? 필요한 물품 있으면 적어 보내세요.

당신의 큰딸 영욱이는 국문 해독을 하고 일일 공부도 혼자 읽고 풀기까지 합니다. 둘째딸 신욱이는 아빠와 함께 산에 도토리 주우러 갔던 일이 인상 깊었던지 가끔 아빠 오시면 도토리 주우러 가자고 합니다. 시간이 깊었습니다. 사랑과 기도로 당신을 기다리며…….      - 1982, 12월 30일 익산 영등동에서

 

나는 아내의 편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답장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공판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 때 교도행정 그대로 신문이나 잡지 구독도 되지 않고 집필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자국의 백성에게 집필할 수 있는 연필 한 토막 주지 않았습니다. 아내로부터 첫 편지를 받고 2주일 후에 다시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는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귀여운 딸들이 여기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세배 드립니다. 할머니께서 사 주신 한복을  두 아이에게 곱게 차려 입히니까 정말 곱고 예쁘기 한이 없습니다.

분홍색 바탕에 양 어깨와 치마의 밑 부분을 둥그렇게 원을 그린 학 무늬의 한복은 눈이 부실 정도로 곱고 아름답습니다. 나중에 당신에게 보이기 위해 사진을 찍어둘까 합니다.

지금은 전주 송천동 부모님 댁에서 아이들이랑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이랑 도련님, 아가씨들도 다 마음이 착찹하여 집안이 우울하기만 합니다. 나 역시 힘들지만 건강하게 집안 살림과 애들 보살핌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날씨가 차가워지니까 당신 건강이 염려스럽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많은 걸 익히시길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 1983년 1월 14일  전주 송천동에서

 

취침은 저녁 8시, 기상은 6시 반인데 잠드는 시간이 길어서 새벽 4시쯤이면 잠이 깹니다. 기상할 때까지의 남는 시간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이기만 했습니다. 나를 고문하며 수사했던 수사관들에 대한 분노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내가 출옥하면 그 수사관의 집을 찾아 일가족을 몰사시켜 버릴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조국은 언제나 이런 국보법이라는 악법을 적용해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하고 정권 안보에 희생의 제물로 이용해야 하는가? 또 그 하수인들의 무분별한 충성, 또 언제 분단은 극복될 것인가? 등을 생각하며 한숨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족 생각에 문득 일어나 앉아 어제 온 아내의 편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당신의 귀여운 두 딸애의 입맞춤을 여기 보냅니다. 당신의 배려로 전 광주 친정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큰 딸 영욱이는 동네아이들과 잘 어울려 뛰어 놉니다. 그런데 걸핏하면 “너 우리아빠 없다고 나 무시하는 거지”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이 원만하지 못한 성격을 어떻게 고쳐줘야 할지 몰라 아쉽습니다. 그리고 둘째 신욱이는 놀기도 잘하지만 어리광이 부쩍 늘어 아주 힘이 든답니다. 노래도 썩 잘하는데 최근엔 ‘아빠생각’이라는 노래를 혼자 부르며 아빠를 찾곤 합니다. 제 이모가 “아빠 어디 가셨냐?”고 물으니까 “공부하러” 하다가 “뭐 하러 물어” 하면서 화를 내더라는 말을 들으며 웃긴 했으나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습니다. 두 애들의 건강을 위해서 매일 우유를 먹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애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다녀올까 했는데 날씨가 잔뜩 찌푸리고 무덥더니 오전 중에는 비까지 내렸습니다. 영욱이가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입니다만 별수가 없군요. 거리거리 만발해 있는 벚꽃을 보니 몇 해 전 금산사 벚꽃놀이 다녀온 생각이 떠오릅니다. 영욱이도 잊지 않고 그 때 이야기를 곧잘 합니다. 여기저기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백목련이 활짝 피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쓸쓸해짐을 느낍니다. 내가 생각해봐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만 결여되어 가고 있는 듯싶고 감정이 메말라 버린 듯합니다. 모든 것 바라보는 눈이 슬프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벌써 시장에는 딸기가 한창입니다. 딸기가 나올 때면 당신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1심 선고가 있는 5월이 가까워지니 괜스레 조바심이 납니다. 예전과는 달리 긴장과 초조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 잘 될 줄 믿지만 만에 하나 1심에 실형이 선고된다면…… 오늘도 성모마리아에게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무사히 당신이 가정으로 돌아와 주시길 바라며, 당신의 사랑스런 두 딸애의 입맞춤을 보냅니다.                                                            - 1983,4월10일 광주에서

 

드디어 83년 5월 24일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3명이 실형이고 6명이 선고유예였습니다. 그 시대의 분위기로 보아서 의외의 판결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단 가정으로 돌아온 나는 그동안 가족의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송회 사건’ 이후 가족이 당한 수난과 아내의 탄원서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계셨던 부친은 사표를 강요당하였습니다. 도교육청에서는 '오송회' 사건 개요를 작성하여 각급학교에 하달했습니다. 그것을 직원조회 시간에 교감이 낭독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내 자식은 죄가 없다. 나는 낭독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낭독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비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경찰은 샅샅이 뒤적였습니다. 별다른 비리가 나오지 않자 시골학교로 좌천시켰습니다. 아버님의 월급에 의지하여 살던 우리 가족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농촌경제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남동생이 미국 오크라호마 주립대학 석.박사 과정 유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여권발급이 잘 되지 않아 유학에 차질이 빚어졌고, 장가를 갈려고 준비하던 은행에 다니는 남동생이 그쪽 집안의 반대로 깨지고, 모친은 가슴에 화가 들어 혈압이 높고 숨이 찬 증상으로 고통 받고 계셨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한 아내는 어두운 표정이었고, 특히 두 딸을 어떻게 교육시켜야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들은 유치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만 노니 친구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동화테이프만 반복해서 듣는 것도 지겨워했습니다.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도 사주지 못하는 아빠의 무기력함이 매우 컸습니다. 나는 고문과 감옥살이의 후유증으로 계속 설사를 하고 있었는데 몇몇 친구가 약값에 보태 쓰라고 준 돈으로 한약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은사나 종교지도자들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만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있으니까 그렇지 괜히 생사람 잡았겠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소위 문인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명 발표나 석방운동을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협회에서 나를 제명하겠다고 법석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정의 경제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변호사 비용과 함께 자잘한 비용들이 많이 보태져서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직 고등법원의 재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앞으로 얼마나 돈이 더 들어야 하고 또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갈지 이만 저만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말을 하지는 않으나 부모형제들이 얼마나 저를 원망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바람도 쐴 겸 큰딸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집에서 가까운 도로를 따라 돌아다니다가 전북대학교 정문 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금테 모자를 쓴 경비를 보자

“아빠 저리 가지마! 경찰이 있어!”
“경찰이 어째서?”

“아빠 또 잡아가면 어떡해?” 저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어린 딸의 의식에도 두려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고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린 딸아이는 그동안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집 옆에 있는 작은 야산에 있는 큰 바위 옆에 가서 날마다 기도를 했다는 거였습니다. 손녀가 자주 야산을 다녀오기에 왜 거기 가느냐고 할머니께서 물었더니 “비밀이야, 비밀이야” 하면서 말을 하지 않다가 자꾸 물으니까 “아빠가 빨리 나오라고 기도해” 하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감옥에 가기 전에 큰 딸애와 가끔 불렀던 노래 ‘꽃밭에서’를 자주 불렀다고 합니다.

뒤숭숭한 2개월이 지나고 광주고등법원에서 83년 7월28일 선고가 있었습니다. 무죄가 나오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먼 판결이었습니다. 징역1년의 실형이 선고되면서 법정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는 친정이 광주이니까 아예 두 딸애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앞두고 아내는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탄원서

 

저는 1982년 11월25일 군산제일고등학교 오송회 사건으로 구속된 교사 강상기의 처입니다.
작으나마 아담한 집에서 두 딸애들과 함께 불편 없이 지내던 날들이 이제는 먼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인이며 국어교사였던 제 남편은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은 어린 딸들과 헤어져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곳에서 하루하루를 억울함과 그리움으로 절규하며 신음으로 바짝바짝 야위어 가고 있습니다.

조부가 한학자인 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어려서부터 조부님의 인격과 학식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조부님은 전북 임실에서 시골길을 걸어 3.1만세에 참가한 항일 운동가였기에 남편 또한 남달리 애국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또한 6.25 동란 때 외삼촌과 숙모가 인민군들한테 사살되기까지 해서 반공정신 또한 투철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제 남편이 국가에 어떠한 죄를 졌다고 이다지도 모질게 처벌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1심에서 석방되었을 때 단지 남편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기쁨에 몸서리쳐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남편이 재구속된 상황에서 가난하나마 행복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집니다. 아빠를 간절히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 두 딸애들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의 기도를 헛되이 말아 주십시오. 엎드려 간절히 바라오니 넓은 아량과 선처를 바라 탄원 올립니다.   - 1983년 11월 6일


항소심의 실형선고로 광주교도소에 재수감되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사정권하에서 대법원은 83년 12월 27일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나는 미래가 없는 불안하고 고통스런 나날을 하염없이 징역 살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내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봉함엽서 앞뒤로 깨알같이 썼습니다.

 

당신과 두 딸아이가 그립기만 합니다.

작년 겨울에 전주교도소에서 지낼 때는 재판 중이었고 졸지에 당하는 교도소 생활이라 요령이 부족하여 계속 감기에 걸리고 허리와 무릎이 아파오고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탈진상태에서 지냈으나 이번 겨울은 아직까지 별일 없이 잘 견디고 있습니다. 1984년으로 해가 바뀐 것을 실감하지 못한 채 어제 온 아침을 또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짙은 안개가 분가루처럼 교도소 주변을 감싸고 있어 내가 지내고 있는 방은 바다 위에 뜬 배의 선실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날씨는 춥지 않으나 실내의 공기가 탁해서 재채기가 자주 나오고 코 속이 뻑뻑해서 다소 답답할 정도입니다. 지난 저녁 8시 취침시간 무렵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새벽쯤 화장실에서 창문을 열고 답답한 호흡을 고르려고 하는데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내가 있는 곳, 이층에서 바라보면 담양 쪽 남해고속도로 방향에서 고속버스, 트럭 지나가는 기계소음이 아득히 모래사장을 핥으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소리 뚝 그치고 교도소 담 주위의 낙엽 진 포플러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헤트라잇 불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모습이 보이고, 관망대의 탐조등에서 비추는 불빛에 반사되어 함박눈이 아카시아 꽃잎처럼 하루살이 떼처럼 난무하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나는 혼자 볼 수 없어 야, 눈이 내린다 하면서 탄성을 지르니 잠자던 재소자들이 "거짓말 마쇼" 하였고 그래서 문을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눈발이 방안으로 흩어져 뛰어 들어오자 그때서야 모두들 잠자다 일어나서 눈 내린 어둠 속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아, 집 생각나네." 하면서 돌아서 제각기 잠자리로 돌아갔고, 그 뒤로 잠들을 이루지 못하고 각자 두런두런 옆에 누워있는 재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침 기상 시간까지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편지 가운데 눈 내리는 겨울에 내가 출소하기를 어린 두 딸들과 함께 기다린다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 딸이 내린 눈을 보고 "엄마, 눈 내리면 아빠가 온다고 했는데 왜 눈 내려도 아빠가 안 와?"라고 말했다는데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에 젖어 들었습니다. 아침에 감방 안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을 수십 번 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난 뒤 양치를 합니다. 그리고 세수하러 세면장으로 들어섭니다. 여느 날과 꼭 같이 반복되는 일과지만 눈발이 보기 좋게 내리고 있는 바깥 풍경에 마음이 들떠 눈 내리는 속을 당신과 함께 걷거나 여행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상상하는 것은 더 없는 괴로움이며 즐거움이었습니다.

아마 오늘은 오전 중에 당신이 접견을 올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지금의 내 기분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아니나 다를까, 밖에 눈은 펑펑 내리는데 오전 중 당신이 접견을 왔습니다. 내리는 눈발 속의 그리움을 좇아 당신이 왔으나 아, 막막한 거리. 플라스틱 유리벽에 가로막힌 당신과 나의 그리움, 단 5분간 몇 마디의 말과 미소의 덧없음, 등을 돌리며 돌아서는 그 무겁고 칙칙한 고독의 뒷모습, 나는 당신의 말보다 당신의 모습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가를 알기에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비수에 찔리는 아픔을 느낍니다.

감방 안의 멍석 위에  멍하니 앉아 하루가 어서 빨리 가기를 바라면서 오직 당신을 생각하고 있자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일도 없고 무엇엔가 열중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 생각만으로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올 뿐, 방안에서는 더러 재소자들의 사주나 수상, 관상을 봐주기도 하고 이를 강의도 해주면서 얄궂은 운명의 비밀을 알아맞추기도 합니다. 나중에 좋은 일은 없는가? 언제 부자가 될 것인가? 그저 미래만큼은 좋을 거라고 제각기 낙관적인 계산들을 하면서 이러한 사주에 가냘픈 기대들을 걸어보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주는 일에 다소 흥미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천차만별의 다른 고민과 걱정으로 재소자들은 괴로워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기기 위하여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는데 너무 승부에 집착하다가 이를 옆에서 구경하며 훈수한 사람과 이년 저년 하면서 말다툼을 하기도 합니다. 이 방에서는 같은 또래끼리 야, 이년아 하면서 농이 섞인 말다툼을 합니다. 좋은 싸움 놔두고 왜 말로 하느냐면서 싸움에 부채질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다 이게 시간 보내자는 짓들이지 뭐 얼마나 즐겁기야 하겠소?

저녁 잠드는 시간은 가장 마음 편안한 고독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입니다. 잠자리에서 코를 고는 사람, 교도관이 복도를 오가며 취침을 확인하면서 취침을 재촉하는 소리, 담요를 뒤집어쓰고 담요 밑에서 서로 수군대는 사람, 밤 8시부터 잠을 청하나 나는 대개 1시간 이상은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 마음은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하다가 이윽고 그리움의 깃발을 잠 속으로 내리고 아침 5시경에야 다시 그 그리움의 깃발을 올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항시 당신을 향하여 나부끼는 이 그리움의 펄럭이는 깃발, 슬프고 애달픈 마음, 이 안에서 먹는 음식 하나하나에도 당신이 생각나고, 문득 창밖을 열어젖히고 변해가는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오직 당신,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생각해도 다 못 생각할 만큼의 부피로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문득 새벽 잠자리에 잠깨어 당신 곁에 고이 잠든 두 딸애를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면서 세월아! 빨리 가 다오. 한 번에 이틀씩 가 다오. 마음속으로 외쳐 봅니다.

다른 재소자들에게 미안하지만 식사는 내가 가장 늦게까지 합니다. 설거지하는 사람들한테 더욱 미안한 일이지만 소화력이 좋지 않아서 입안에서 음식물이 풀죽처럼 될 때까지 씹어 먹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탁, 목욕, 면도, 진찰 등을 하고 당신에게 깨알 같은 이 편지를 쓰는 일이 즐겁습니다. 당신과 마주앉아 길게 대화하는 기분이 되어 주기 때문에 아주 즐겁군요. 이만 줄입니다.           - 1984년 1월 4일

 

광주교도소에서는 '남민전' 사람들하고 한 방에서 지냈는데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안재구 교수가 주재했고, 김남주 시인이 일본어로 된 『프랑스혁명사』를 읽으면서 흥미 있는 부분을 소개하기도 했으며 그는 매일 냉수마찰을 했습니다. 건강했고 유머가 있었습니다. 김남주는 나와 동년배이고 문학에 대한 관심사가 같아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석방일이 가까웠습니다. 석방 전에 사전 심사를 하는 모양인데 그때 심사위원으로 안기부 직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깜짝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광주 안기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수 없이 똥 밟았다고 생각하라면서 그 친구는 웃었습니다.


만기 출소 후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로 뛰어다니다

 

드디어 84년 3월26일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내가 출소할 때 두 딸아이가 “아빠! 아빠!” 하면서 달려와 내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출소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크게 느끼면서 형량이 많아서 출소하지 못한 다른 동료 선생님들을 뒤로 하고 먼저 출소하는 것이 죄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아,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는 형을 다 살고 나왔기 때문에 생활인으로서 가정을 추슬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은 없고 다른 기술도 없는 지라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신장 기능이 많이 나빠져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붓고 손이 잘 쥐어지질 않았습니다. 몸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하는데 돈이 없는 것입니다. 일자리를 알아보느라고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만났더니 몸에 좋다고 큰 잉어를 한 마리 사주어서 집에 가지고 왔더니 아내가 비린내를 무릅쓰고 큰 찜통에 고았습니다. 또 한번은 시청 축산과에 근무하는 친구가 소 내장을 한 바구니 보양하라고 보내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습니다.

몸을 어느 정도 다잡은 후에 가족 모르게 공사장에 나가보았습니다. 벽돌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현장 감독이 이런 일은 해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건축을 하고 싶은데 경험삼아 해보고 싶다고 간청해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오전 중에는 할 만했는데 오후에는 상당히 지쳤습니다. 그날 밤에 집에 돌아와 자는데 정말 온몸이 쑤시고 아팠습니다. 나는 다음 날도 나갔습니다. 힘에 벅찼으나 오기가 발동해서 참으면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3일을 아파 누웠습니다.

평생을 이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 뒤로 나는 막노동하는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는 틀림없이 삭신이 쑤시는 고통을 겪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그 고통을 견디는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막노동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이틀간의 노임은 포기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온갖 궁리를 해보았으나 돈이 될 만한 특별한 계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후배가 보험을 해보라고 권했으나 지인들에게 폐만 준다고 아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이 일도 포기했습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이 모아졌습니다. 나는 전주 시내 학원에 혹시 국어강사 자리가 있는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나는 친구가 강사로 일하고 있는 전주 청산학원에 놀러갔습니다. 친구는 당뇨와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학원을 그만 두려고 했는데 마침 잘 왔다면서 “네가 강의하라”고 해서 갑자기 대입재수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한 지 며칠이 채 안 되어 학원 원장이 “강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음 달부터는 강의를 맡길 수 없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학생들 반응이 안 좋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고, 정보과에서 그런 사람에게 왜 강의를 시키느냐고 해서 어쩔 수 없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쁜 새끼들, 온갖 고문을 하면서 사건을 조작하여 가정을 풍비박산시킨 놈들이 이제는 밥줄까지 끊어 굶어죽게 하려는 것인가? 나는 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보안 감찰하는 담당자를 찾아내어 학원 강의를 끝내 방해하면 그 집안 식구를 몰사시켜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나는 담당형사와 삼계탕 집에서 만나 점심을 했습니다. 왜 내가 학원 강의하는 것을 방해하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담당형사에게 질문을 했더니 학생들을 의식화시킬까 봐서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의식화시키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내가 처벌받으면 될 것인데 왜 당신이 나서서 생계를 끊느냐? 양심이 있으면 오히려 당신네들이 내 일자리를 알아봐주거나 내가 찾은 일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학원장에게 때를 잘 못 만나 고생한 사람이니 잘 부탁한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렇게 내 살 길을 방해한다면 나도 결심한 바가 있다. 나도 더 이상 출구가 없기 때문에 나 하나 목숨 던진다고 생각하면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다. 당신 혼자 특진하고 잘살 것 같으냐고 항의했더니 너무 흥분하지 말고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학원 강의 못하게 해놓고 말이 되느냐? 당신의 진심이 그렇다면 학원장을 지금 이 자리에 오도록 해서 내가 강의해도 좋다는 말을 해라 이렇게 해서 원장을 포함하여 세 명이 앉은 자리에서 가까스로 타협을 보고 강의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어렵사리 얻은 학원 강사 자리였습니다. 이때가 1984년 늦가을이었습니다. 학급수가 적어서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우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익산에 있는 집은 비운 채로 두었으나 팔기로 했습니다. 거의 2년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하고 두 딸 양육비며 변호사 비용 등 생활비 때문에 상당히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돈을 갚을 길이 막연하여 집을 팔았습니다. 1200만 원에 팔았는데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단독주택이었습니다. 결혼비용을 절약하고 저축한 돈으로 월세 집에서 단독주택을 마련하여 이사한 뒤 내 이름이 적힌 문패를 붙였을 때의 감격은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그동안에 진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전주시 우아동 3가 743-48 우아아파트 2단지 112동 203호 18평으로 전세를 들었습니다. 비록 작은 전셋집이지만 단란한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개별 난방을 하는 연탄 아파트였기 때문에 연탄을 때맞춰서 갈아주는 것이 좀 불편하긴 했으나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틈나면 두 딸과 놀아주었는데 큰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니까 덜 심심하지만, 둘째는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하는 것을 돈이 없어 보내지 못하니까 친구 따라서 유치원에 갔다가 울면서 쫓겨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심정은 정말 겪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난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미당의 「무등을 보며」를 생각하며 이때의 심정을 시로 써 보았습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가 아니다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 다 사라진다.

 

애비는 돌아오지 않고
이 웬수 놈의 세상, 너 죽고 나 죽자
에미가 자식 목을 조르자
엄마, 밥 안 달랄게 살려 줘
애틋한 눈망울 외면하며
에미는 어린 새끼들의 목을 조를 수밖에 없다.

 

가난의 때가 오거든
그대들이여, 더러는 도둑이 되고
더러는 일가족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가난은 늘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가난은 살해를 꿈꾸는 일인 것이다   - 졸시 「가난에 대하여」

 

학원 강사료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재수생을 모아서 수업을 하는데 학급수가 적어 시간 수당을 많이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입이 적다보니 집 팔고 조금 남은 돈을 허물어 써야 했습니다.

아내도 삶의 기쁨이 없이 수심이 가득하여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이혼, 그리고 재결합

 

나는 돈이 되지 않는 시를 쓴답시고 집안에 쳐 박혀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구속되기 전에 출판하려고 정리해 둔 시집 원고를 압수당하여 돌려받지 못했고, 박두진 시인이 써서 보내온 시집 서문도 이때 압수되어 사라졌습니다. 나는 아예 글 쓰는 일을 접었습니다. 내 생전 시인으로서 길을 가고자 했으나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할 책임 있는 가장으로서 문학 활동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청산학원에서 나와 전주한샘학원에서 1년 동안 수업을 했으나 겨우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1985년 겨울이 되어 이때는 학원 강의도 없고 좀 지내기가 힘들었는데 학원에 나가 강사들과 어울리다가 집에 들어오니 어머님이 와 계셨습니다. 어머님도 아버님과 다툼이 있어 아버님을 피해서 큰아들인 나를 찾아오셨는데 아내와 말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시어머님께 “여기서 사는 동안 연탄 한 장 떼어주시지도 않고 그렇게 무심할 수 있으시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 문제로 고부간에 많은 다툼이 있어서 마음에 골이 패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저녁상을 받아 놓고 화가 나서 상을 뒤집어엎었습니다. 왜 어려운 때 잘 지내야지 이러느냐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나는 가게에 가서 소주를 샀습니다. 나는 무작정 걸으면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한 병을 다 마시고 다른 가게에 가서 또 소주 한 병을 샀습니다. 빈속에 소주를 마시니 속이 아려오면서 취기가 올라왔습니다. 차가운 겨울 저녁의 하늘을 바라보니 대열에서 벗어난 기러기 한 마리 외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내 신세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내 슬픔처럼 눈물에 젖어 있는 듯 보였습니다. 술에 취해 다니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님은 가셨는지 계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이야기 좀 하자고 했습니다. 앞으로 민주제단에 내 한 몸을 던져 버릴 테니 두 딸아이를 혼자 잘 양육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말이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 내가 벌어 준 대로 먹고 살아야지 불평만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는 못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희망이 없으니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힘들게 참으면서 억지로 살려고 할 필요가 뭐 있느냐? 그냥 서로 깨끗이 헤어지면 될 것을 뭐 그렇게 피차 상처를 주면서 살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경제적으로 악화된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헤어졌습니다.

1986년 1월 27일에 합의이혼을 했습니다. 결국은 국가보안법이 단란한 우리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서 다시 한번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전세금을 뽑아 친정으로 갔습니다. 놓고 간 두 딸은 어머님한테 부탁을 했습니다. 어머님은 어떻게 손녀 둘을 키우느냐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부모가 헤어진 것을 안 두 딸은 곧 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빠가 새엄마를 데려와도 좋겠냐고 할머니께서 손녀에게 물으니 작은딸이 콩쥐팥쥐를 보니까 새엄마는 나빠! 나빠! 하면서 엄마, 엄마! 전화통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이제 저 애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을 벌어야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광주학원으로 옮겼습니다. 주야로 많은 노력을 했으나 돈이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1년 만에 겨우 5백만 원 정도가 모아졌습니다. 나는 다시 서울로 학원을 옮겼습니다. 낮에는 종합 반에서 강의하고 야간에는 단과 강의를 했습니다. 1년을 그야말로 하루 11시간씩 수업을 했습니다. 서울 남산 아래 용산구 후암동 하숙집에서 밤늦은 저녁에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산에서 조깅을 했습니다. 이렇게 피나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강남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살 돈이 마련되었습니다. 나는 두 딸을 데려다 양육하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기꺼이 재결합에 동의했습니다.

1987년 10월 20일에 재결합하여 다시 소중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에 이사하여 두 딸 아이가 아파트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니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다행히 큰딸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는데 둘째 딸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미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촌지가 있었고 학부모들이 일 년에 한 번쯤은 담임선생님을 찾아보는 것이 상례인데 나는 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아빠가 감옥에 갔다 왔다면서? 그래서 담임선생을 찾아오지 않는구나!”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도 시키지도 않아서 아예 아는 것이 있어도 손을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 나는 그때 상황을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그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은 기억하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1년 동안이나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이렇게 어린아이들의 동심까지 멍들게 만들다니! 나는 내 아내와 두 딸이 얼마나 힘들게 나 때문에 심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왔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 국가보안법을 악용한 국가권력이 소름끼치게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나는 두 딸아이가 인문계에 적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딸은 디자인에 소질이 있어서 대학을 그 쪽으로 보낼까 했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였고, 작은 딸은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보고 싶다고 해서 걱정이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신원조회나 면접에서 아빠의 일로 연좌제를 적용하면 큰 문제이겠다 싶어서 이과로 가서 전문직을 선택하라고 종용했습니다.


17년 만의 복직과 26년 만의 재심 무죄판결

 

나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내 딸들의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좌표가 바꿔졌으니까 말입니다. 특히 두 딸아이를 결혼시키는 데도 이 국가보안법이 문제였습니다. 혼담이 잘 무르익다가도 아빠의 전력을 속일 수 없어서 이실직고하면 출세에 지장이 있다면서 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딸은 결혼이 늦어졌고, 작은 딸은 언니의 그런 상황을 인식하고서 한의과대학 다니면서 만난 커플과 연애하여 대학 재학 중에 언니보다 먼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아예 동창회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동창들의 따가운 시선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가톨릭에 입교하여 고요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들을 신앙생활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한 아내에게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머리숱도 적어지고 명주실오라기 같은 흰 머리카락이 느는 것을 보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합니다.

지금껏  나의 개인적 삶은 가정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나를 끝내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지인들과  태국에 여행을 가게 되어서 여행사에서 단체로 여권을 신청했는데 내 것만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안기부에 연락이 닿아 가까스로 단수여권이 발급되었는데 나의 일을 모르고 있던 지인들이 알게 되어 경계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태국에 여행할 때의 언행을 지인들 중심으로 정보기관에서 조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뒤로 지인들과도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90년대 초에 우리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으로 효도관광을 한 일이 있는데 이때도 여권 발급이 잘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2007년 대선 무렵 대학 동창과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선거이야기를 하다가 언쟁을 하게 되었는데 나더러 “너는 빨갱이로 처벌받은 놈이 아니냐?” 하는 말을 듣고 기가 찼습니다. 아,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가슴을 쥐어뜯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음식점이나 찻집, 노래방이 있는 지하실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공 분실의 지하실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99년 9월, 교직에 복직되었습니다. 복직이 아니라 신규로 채용된 것입니다. 1982년 11월에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파면되어 꼭 17년만의 일입니다. 그동안의 호봉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직 평교사로서 다시 교단에 서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나는 2009년 8월에 정년을 했습니다. 근무기간이 20년이 되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나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20년이 채 되지 못해서 정년 이후 연금 혜택이 전혀 없습니다.

다행히 둘째 딸의 한의원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49살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이제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내가 지은 죄로 인하여 아들에게도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늘 걱정했는데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근심 하나는 덜었지만, 요즈음은 교육비도 엄청 많이 드는데 아들을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염려를 하면 두 딸들은 자기들이 잘 보살필 테니 걱정 말라고 합니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을 두 딸들한테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할 석양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982년 11월 25일에 구속되어 2008년 11월 25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무려 2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광주고등법원 이한주 재판장은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무고하게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였고, 그로 인하여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감내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받았던 점에 대하여 우리 재판부는 피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 다행이고 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이제는 떳떳하지만 그동안 받았던 온갖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감옥 밖의 감옥 생활, 무덤 없는 주검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온 세월,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격리되고 외딴 섬으로 유배되듯이 사회적 생명을 빼앗긴 채 용케도 살아왔으나, 내 망가지고 뒤틀어져 버린 인생을 국가는 과연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딱하게도 나를 처벌했던 국가만을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씨앗, 그 감옥을 파괴하라
- 평화와 상생, 공존을 위하여

 

씨앗은
수천 송이의 꽃과
수천억의 이파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다

 

감옥을 파괴하라.
파괴된 감옥이
다시 감옥을 만들지라도

 

아름다운 꽃이 피고
푸른 이파리들이 살랑거리는 세상을 위하여
감옥을 파괴하라      -「씨앗」전문

 

수많은 양심수와 국가보안법 사범이 있는 이 시대의 감옥을 놔두고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말할 수 없다. 각 개의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씨앗이라고 한다면, 씨앗이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으면 "수천 송이의 꽃과 수천억의 이파리들"이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 아니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게 생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죽은 씨앗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1980년대 초반 세칭 ‘오송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나를 고문하던 수사관이 내가 읽은 책을 점검하면서 "네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서 도스도예에프스키라고 했더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다시 물었다. 러시아 사람이라고 했더니 "이 자식 정말 빨갱이구먼"이라고 단정했다. 이어서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읽었다고 했더니 조서에 '씨아르 소리'라고 적어서 속으로 씨알도 모르는 놈이 수사를 하니 내 죄를 내가 만들도록 고문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나를 고문하는 수사관에게 나는 어떤 대응 수단도 없었다.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폭력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짓밟혀 버렸는데 용케도 완전하게 뭉개지지는 않고 모양이 틀어진 대로 아직 살아 있지만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거대한 어둠과 맞서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거대한 어둠을 물리치려면 나도 어둠이 되자, 그래서 나를 고문한 수사관을 죽여 만천하에 고발하자는 생각을 그 당시에 했다. 그러나 이것도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절망했다. 이 거짓투성이의 어둠을 몰아내는 일은 수없는 생을 살아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도 성찰해보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나의 증오심이야말로 어둠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일 수밖에 없다. 빛을 밝혀야 어둠은 물러난다.

어둠과 싸우는 것은 내가 빛이 될 때 가능하다. 옥중에서 『금강경』을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이기에 사랑의 빛을 발산하자고 작심했다. 그러나 사람은 매우 깨지기 쉬운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감각에 의존하며 살 때 더욱 그렇다. 감각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은 지속적인 토대가 없다. 권력, 명예, 부귀 등 세속적인 이런 것들이 다 감각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허망한 감각의 세계에 매몰되어 정말 허망하게 살고 있다. 그야말로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메말라 버리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시대를 살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바위처럼 무거운 중압감에 시달리는 이유도 진리를 찾지 않고 감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을 뛰어 넘어 삶의 진리 속에 나를 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의 에너지를 가슴에서 머리로 옮겼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가슴, 즉 감수성이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서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무시하고 논리를 가르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신을 잊어 버렸다. 자신의 가슴에 고동치는 내면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잃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자기를 구속하고 들어앉아 있으면 사랑을 만들 수 없다. 씨앗으로 존재하는, 잠들어 있는, 그러나 언제라도 깨어날 수 있는, 이런 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씨앗이라고 해서 다 씨앗은 아니다. 발아할 수 없는 쭉정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씨앗은 동트는 빛을 찾아 나서거나, 대지의 촉촉한 수분을 찾아 나선다. 이를 깨어 있는 씨앗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씨앗이 깨어있지 않으면 가슴 속의 싹을 틔울 수 없다. 여린 떡잎으로 억압의 흙을 밀어 올리면서 세상의 창을 바라봐야 한다.

깨어나지 못하는 씨앗은 진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허위의 세계에 안락하게 도피하고 있거나 아직은 꿈을 꾸고 있을 뿐, 좌절이나 절망의 울안에서 제 껍질을 찢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둠을 찢고 나올 때,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진리는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본래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와 함께 있으면 '나'만이라는 세상이 '다 함께'로 바뀐다. 씨앗은 자신을 부정하며 위험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씨앗은 거대한 침묵이기 때문이다. 씨앗은 거대하고 영원한 침묵 속에서 나온 것이다.

씨앗이 침묵을 깨려면 때가 성숙해야한다. 씨앗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고, 햇빛과 수분과 공기를 받아 들여야 한다. 분위기가 성숙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항상 주의 깊게 자신을 살피며 깨어 있어야 한다. 온몸의 모든 세포들을 열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생명의 바람이 불어 죽지 않고 살아나도록, 아니 생명의 본질인 이 씨앗은 우주의 일부가 아닌가? 진정한 씨앗은 결코 죽지 않는다. 씨앗은 생명의 영원성을 안다. 침묵을 뚫고 나와서 자연과 교류해야 함을 안다. 오랜 침묵이 있었기에 저 살랑거리는 녹색의 평화와 황홀하게 아름다운 꽃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아름다움, 그것은 생명의 구가이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은 악몽이다. 깨어나야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씨앗이 깨어나지 못하면 불행한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만들어야 할 낙원 같은 세상을 위하여 과감하게 감옥을 부숴야 한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감옥을 깰 수 없다. 사랑은 나의 아름다움을 누군가의 가슴에 얹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나의 행복이 넘쳐나는 것이며 나의 사랑을 나주어 주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도 사랑이고, 자라는 것도 사랑이고, 꽃을 피우는 것도 사랑이다. 왜냐하면 나누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세상은 낙원이다.

우리는 항상 낙원을 꿈꾸며 산다. 지금 당장 낙원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을 그리고만 있는 것은 사랑한다면서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함께 있는 사랑이기에 그렇다. 그런 사랑은 미움이나 다름없다. 복권 긁듯이 사랑을 긁으면 미움이라는 글자가 드러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쓰는 행위에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버리는 것이 된다. 시 쓰는 일을 매명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씨앗 속에 깃들인 벌레이거나 살랑거리는 이파리에 달라붙은 벌레일 것이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시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50년 넘게 시를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를 써야 하는지 명쾌한 답도 없이 시를 썼다. 시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한다든지 정책을 바꾼다든지 하는 효용성의 문제를 생각하면 그 역할이 미미하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함은 살기 위함임을 안다. 그러나 단지 살기위해서만일까? 맛을 즐기기도 하지 않는가? 혹시 시를 쓰는 것은 칭찬을 구걸하는 것은 아닐까? 이름을 얻고 싶고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은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시를 읽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자꾸 시를 쓰다니! 그리고 이렇게 시 쓰는 사람이 계속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뭘까? 경제적 여유가 생겨 공허함을 메꾸려함일까?

그렇다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은 시를 쓰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스스로가 씨앗임을 자각하고 싹을 틔우거나, 깨어나지 못하는 씨앗한테 자극을 주어 일깨워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가슴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씨앗은 우주에 있다가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씨앗의 사랑이 발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이루지 못한 사랑은 뒤에 남은 씨앗 속에 심령을 남겨 연속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씨앗이 깨어 나오도록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씨앗은 두 개의 떡잎으로 갈라져 나온다. 분열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라는 뜻이다. 평화와 상생, 공존을 위하여 나눔이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실천해야 할 덕목임을 일깨워준다. 나는 바로 우리 삶이 그러한 사랑의 일깨움과 실천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시를 쓰고 있다.
 

나와 대면하며 나를 벗어나기


1.

18대 총선 뒤
무너진 마음으로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가난하고 비참한 민초들이 부르는
구원과 희망의 노래를 들었다

바리케이트 너머 꿈을 보며
붉은 깃발과 총을 들고
그들은 죽음과 바꾸는 행동을 했다

고작 붉은 인주로
참세상 오리라 다짐도 헛되이
나는 비굴하게
영화관 뒤쪽에 앉아 있다      - 「뒤쪽에 앉아서」 전문
        
나는 어떠한 억압구조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는다. 물론 우리들은 누구나 억압을 받으며 살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제도, 인습, 전통 등에 억압을 받고 있다. 이러한 억압으로부터 자유스럽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저러한 관계 속에 또는 어떤 이념에 얽매어 있으면서 우리가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철저하게 억압되어있는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억압된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엄청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본다.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억압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살 수밖에 없다.

다시 생각해보면 과연 내 마음이 이러한 억압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먼저 억압을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에는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있다. 의식적인 마음은 일상적인 억압에 갇혀 있다. 무의식적인 마음은 각종 충동들이 잠자고 있다. 이 의식, 무의식적인 마음이 그 자체 어떤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물론 없다. 내 마음이 없어진 상태가 아니고서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조차도 없어진 상태로 몰입하길 좋아한다. 나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없는 명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는 언어가 없다.


2.


나는 분명 존재계와 나를 분리해 생각함으로써 존재계가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나를 고요히 명상 속에 비워버리면 존재계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저 허망함과 덧없음이 자연이고 나 또한 그렇다. 미혹의 잠에서 깨어나도록 나를 일깨우는 것, 내가 시를 쓰는 행위는 곧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잠들어 있다. 눈 뜨고 깨어 있다고 하는 대낮에도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온갖 상념으로 마음이 들끓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잠들어 있다.


벌써 잠들었는가

달이 찾아와
문 앞에 있지만
문은 열려 있지 않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가

태양이 다가와
문 앞에 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어나는
새날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 「잠든 사이」 전문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보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온갖 상념의 구름이 걷히고 텅 빈 하늘이 된 마음, 이것이야말로 깨어있는 것이다. 생각 자체가 끊어지고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한 순간, 자신의 실체를 본다. 이러한 통찰력이 나에게 자유를 준다. 시 창작 속에서도 이 명상의 기분을 느낀다. 그동안 온갖 지식의 학습으로 세뇌되어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마음을 활짝 열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정원의 꽃 세상과 하나가 되도록 닫힌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임을 안다.


3.


어떤 믿음에 집착하는 것도 나를 억압하는 일이다. 신을 믿으면 신이 나를 억압한다. 그러므로 어떤 믿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투명한 마음이 필요하다.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비추는, 왜곡시키지 않는 그 마음을 필요로 한다. 믿지도 않고 불신하지도 않는 상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지식은 내가 알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 유식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무지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지식에 의존하고 지식에 제약되기 때문에 진정으로 아는 자가 아니다.

교수가 농부 앞에 가 봐라. 농부 앞에서 맥을 못 춘다. 농부는 진정한 삶으로 자신을 증명하지만 교수는 학위증으로 인정받는다. "저 논밭이 내 몸이고, 내 마음이지요, 내 피붙이올시다." 농부의 말에 교수는 어안이 벙벙하다. 교수는 "학위증이 내 몸이고 마음이지요, 내 밥이올시다." 라고 말한다. 또 농부는 말한다. "교수라는 작자들 뭐 머릿속에 들은 것은 많은가 본데 하는 것을 보면 엉망입데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삽데다. 머리 무겁게 지식쓰레기를 담고 다녀요. 나는 다 비우고 사니까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디다. 나는 저 논밭에 나를 다 주어버렸어요. 나는 글을 모르니 마음을 사용하지요. 당신은 마음을 모르니 글만 쓸 수밖에." 나는 농부의 마음으로 시 쓰는 나를 만난다.


4.


마음을 들여다보면 죽음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 두려움을 회피하기위한 비굴한 나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 두려움과 정면 맞서야 한다. 벌벌 떨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파헤쳐 알아야 한다. 평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독거리면서 죽음의 깊이 속으로 찾아들면 비로소 사랑을 발견한다. 사랑 안에 내가 존재할 때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진다. 두려운 에너지가 사랑의 에너지로 바뀐다. 두려움 속에 소중한 사랑의 보물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내 마음 어둠의 대륙에 착륙하여 탐색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진짜 달과 해는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빛이 내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긴 평화, 긴 기쁨이 넘실거린다. 내 안을 비추는 이 불빛이 열정의 삶이 되고 사랑이 된다. 공허함과 광막한 삶의 끝, 의식 너머에서 나의 시가 온다. 이러한 풍부한 에너지를 바른 방향으로 지향시켜 폭 넓고 심오한 삶으로 창조해 내는 시 쓰기가 나를 조금은 자유롭게 한다.


나는 재갈 물지도 않았고
편자 하지도 않았다
누가 나를 길들이기 위하여
당근 주지도 않는다
나는 목장 밖에서 살기에
아무런 제약도 없고
노예시장에 투입되지도 않았다

눈가리개한 채 오직 목표 향하여
기수 채찍질에 내달리며
관중들 환호성에 답하는 주파기록에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긴 평화 긴 기쁨이 자유롭게 넘치는
대초원과 하나 된 삶이
나를 증명하는 나의 전부이다      - 「야생마」 전문

▲ 강상기 시인이 3일 전북문학관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전북 문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람일보

 

<강상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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