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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기 시인이 들려주는 '나의 삶, 나의 문학'
강상기 시인이 전북문학관 특별강연에서 밝힌 약전
기사입력: 2019/05/06 [22:1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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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기 시인이 3일 전북문학관(관장 류희옥) 강당에서 '나의 삶, 나의 문학'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람일보


강상기 시인은 5월3일 오후 2시 전북문학관(관장 류희옥) 강당에서 김광원 학예사의 사회로 진행된 '나의 삶, 나의 문학'을 주제로 한 '5월 문학광장' 특별강연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오송회사건' 5공 이적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의 진실을 밝혔다. 강 시인은 이날 우리 시대 문학의 사명과 관련해 "작가들은 개인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분단극복과 조국통일을 추동하는 문학을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전북문학관 강연장에서 배포된 강상기 시인의 약전을 싣는다. <편집자>


<강상기 시인 약전>


1946년 임실군 임실읍 신정리 215번지에서 강두열(부), 최예분(모)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그때 아버지는 21살, 어머니는 19살이었다. 젊은 부모라서 양육은 주로 조부모님 몫이었다. 어린 내가 경기를 일으켜 죽을 지경에 조부가 우황을 먹여 살려내시다.

1950년 불안한 집안 분위기와는 아랑 곳 없이 포성소리를 들으며 지내다.

1951년 저녁에 빨치산이 집에 들어와 식량을 가져가다. 조부께서는 나를 등에 업고 빨치산이 요구하는 대로 곡식을 내주었고 어머니는 재봉틀만은 뺏기지 않다. 임실군 오수의 시장 부근에 있는 집으로 부모님이 이사하시다. 아버님이 오수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찾아간 부모 집에서 엄마가 낯설어 여름날 열어논 창호지 문 뒤로 숨다. 이후 말썽만 피웠다.

1952년 완주군 삼례로 이사하다. 부친이 삼례초등학교로 전근되셨기 때문이다. 삼례지서 뒤 어느 집에 세들어 살았다.  재봉틀서랍에서 돈을 꺼내 동네가게에 가서 호루라기, 눈깔사탕, 비과 등을 사서 동네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오다. 저녁 무렵 엄마가 돈의 용처를 물었다. 어머니는 나를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면서 대나무자로 마구 때렸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무리지어 동네아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나를 어머니는 지도자감으로 생각해서 지도했어야 했다. 몇 달 후 성당이 있고 농협창고가 있고 기차역이 가까운 마을로 이사를 하다.

1953년 삼례초등학교에 입학하다. 등교는 아버지 출근길에 항상 동행했다. 하교 길은 집에서 기르던 검정개 메리가 교문에서 기다렸다.

1954년 살던 집이 관사였는데 조부께서 불하받다. 집 앞 텃밭 500 여 평도 사다. 우물이 깊어 물이 좋기로 동네에서 유명해서 이웃들이 물을 길어가다. 집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이루어졌고, 밭농사를 지으니 먹는 게 푸짐하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아욱, 가지,  부추, 단수수, 양파, 고추, 토마토, 참외, 수박 등. 그러나 밭에서 풀을 뽑고,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하다. 거기다 돼지까지 기르고 있어서 독새풀을 베어다 돼지한테 먹이고 또 논농사도 2400평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심부름을 해야 하다.

1955년 동네 아이들과 철교 위를 달리기 시합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다리 아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수영도 할 줄 몰랐는데 물살에 쓸려 냇둑 물풀이 많은 곳에 쳐박혀 있다가 구조되다.

1956년 내가 제일 기다리는 것은 방학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임실고향에 계시는 조부모님 댁에 가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조부께서 붓글씨와 한자를 가르쳐 주셨기에 좋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시조를 암기해서 조부께 들려 드리면 몹시 좋아하셨다. 저녁에는 조부님은 한시도 지으시고 시조창도 하시면서 방안까지 들어와 있는 달빛 속에 앉아 계시다. 조부님은 전우선생 제자로서 한학자이셨고 고종황제 인산 일에 맞춰 한양에 가셔 3.1만세운동에도 참여하시다.

1957년 어머니가 아프시면 내가 밥을 하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만들어서 동생들과 함께 먹기도 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네가 큰 딸이었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시면서 아쉬움을 나타내다.

1958년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종로통으로 지나가는 전차가 좋아서 일없이 여러 번 타다. 부모님이 용돈을 많이 주셨는데 거의 쓰지 않고 다시 집에 가져가다. 부모로부터 칭찬을 기대했으나 몹시 꾸지람을 듣다. 쓰라고 준 돈인데 바보같이 쓰지 못했다고. 나는 그 뒤로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불안해서 다 써버리는 낭비벽이 생기다.
 
1959년 삼례중학교에 입학하다. 담임선생님이 도서관 담당이셨다. 나는 담임선생님 보조역을 하면서 도서 대출과 반납 업무를 맡다. 이때 많은 책을 접하게 되다. 세계위인전과  탐정소설을 많이 읽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자 학교에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8절지 갱지를 나눠주다. 나는 마침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를 읽었던 터라 8 절지 2장반을 쓰다. 학내에서 장원을 해서 상장과 상품을 받아 집에 가져갔더니 아버님께서 몹시 역정을 내시다. 상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다. 나는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끼다. 수업도중에 이승만을 찬양했던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배척되다. 나는 이때부터 시사에 관심을 갖게 되다.

1961년 담임선생님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선생님이셨다. 학생들이 하교하고 난 뒤 음악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소리가 좋았다. 더구나 선생님은 『자유문학』을 구독하시면서 시를 열심히 쓰시는 분이었다. 학급문고 『복사꽃』을 프린트본으로 간행하기도 하다. 군사쿠데타로 민주정권이 붕괴되다. 혁명공약을 암기하라고 했고 학생들에게 배척당한 선생님들이 다시 교단에 서다.

1962년 목포해양고등학교 항해과에 진학하다. 유달산 아래에 있는 학교였는데 교실유리창 밖으로 목포 앞바다가 잘 내려다보였다. 국립학교여서 수업료는 면제받았고 교복과 급식비를 제공받다. 군대식 교육인데다 3월에 심한 독감에 걸려 고생한 탓인지 학교수업도 재미가 없었다. 하교 길에는 항구에 들러 뱃고동을 불며  떠나는 외항선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최희준의 <하숙생>이 라디오연속극 주제가로 흘러나왔는데 특히 그 노래를 지금도 좋아한다.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1학기 말에 사촌형이 다니고 있던 전주 신흥고등학교로 전학을 하다. 신흥고등학교는 숲에 둘러 싸여 캠퍼스가 몹시 아름다웠다. 점심때는 항상 좋은 음악을 들려주어서 정서적으로 퍽 좋았으며 기독교 학교인데다 선생님들께서 민주적으로 학생들을 대해 주 다. 국사선생님 강의에 매료되어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되다. 국어수업시간에 가을에 관한 수필을 쓰게 되었는데 내 글이 뽑혀「가을의 상견」이라는 제목으로 교지에 실리다. 처음으로 내 글이 활자화되다.
1963년 학교공부에 전념하다. 삼례에서 전주까지 통학을 했는데 한 번은 밤 10경 이미 출발하고 있는 마지막 열차를 가까스로 탔는데 그만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순간 모자를 포기할까 뛰어내릴까 하다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렸다. 플랫홈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 쓰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12km가 되는 신작로를 걸어 집에 돌아오다. 달이 밝고 저녁을 굶은 탓이었는지 그 밤은 나에게 색다른 느낌을 안겨주다.

1964년 교내 백일장이 있었다. 희망자만 참여하게 되었는데  백일장에 참여하는 친구를 따라 교내언덕 숲에서 그 친구가방을 지키고 있는데 그 친구가 기다리기 지루할테니 너도 써보라고 해서 쓰다. 그 친구가 내가 쓴 시를 가져가 제출하다. 그 작품이 장원을 하다. 나는 내 재능을 묻고자 신석정시인을 찾다. 신석정시인은 술부터 가르치고 시 이야기는 하지 않다가 전송하면서 열심히 써 보라고 하시다. 대학입시를 팽개치고 시만 쓰다. 그리고 전주 고교생 혼성 동아리 <길>동인을 만들다. 삼례 금성다방에서 가을에 시화전을 했는데 신석정시인은 방명록에 “시도는 가시밭길이다“고 쓰셨고 당시 국어를 가르치셨던 허소라 시인은 ”영원한 기약을...“이라고 쓰시다. 학교에서 간행하는 『신흥춘추』에 산문을 발표하다. 한일회담반대 시위에 참가하다. 보릿고개에 이웃 돕기를  호소하는 교내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얻다. 술과 담배를 배우다. 술과 담배는 교지편집을 하면서 중국 요릿집 뒷방에서 배우다.

1965년 전주교육대학에 입학하다. 교사가 되는 꿈은 중1때부터다. 위인전을 읽어보니 성인들의 공통점이 제자가 있는 스승이다. 성인들은 해와 달 같지만 나는 작은 반딧불이라도 되자고 생각하다. 기숙사에 입사하다. 그러나 한 달 만에 기숙사를 나오다. 한 방에 다섯 명이 생활했는데 내 기숙사등록비 1410 원을 누군가 훔쳐다가 제 앞으로 등록을 해버려서 나는 기숙사를 나오다. 도둑은 내  이삿짐을 천연덕스럽게 역까지 들어다 주다. 나는 강의 시간에 잘 들어가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보다. 해가 저물면 술을 마시다. 주로 여친들이 술을 사다. 신석정시인이 『문학춘추』에 추천을 해준다고 해서 시를 보냈는데 재정난으로 출판이 되지 않아 햇빛을 보지 못하다. 공부는 하지 않아서 11개 과목이 재시험에 걸려 재시험을 봐 통과되고 문화사 1과목이 재수강에 걸리다.

1966년 학보사 편집장을 맡다. 『시문학』에 「봄이설」 「바다」 두 편을 발표하고 ,『현대시학』에 「새로운 풍물」을 발표하다. 월간 종합지『세대』 6월호에 제1회 시 부문 「이천이백만헥터의 딸기밭」으로 신인문학상을 받다.

1967년 장수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다. 2학년을 담임했는데 수업 중에 아이들이 너무 몸을 꿈틀거리는 이유가 몸에 이가 많은 탓이었다. 수업을 팽개치고 이를 잡아 필통에 담으라고 했더니 도망간다고 해서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고 집에 가서 오늘 수업중에 이를 잡았는데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하라고 했더니 그 뒤로 아이들은 수업중에 몸을 트는 아이가 없었다. 나는 법정 수업대로 오전 수업만 하는데 다른 분들은 6교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일제고사 때문이었다. 나는 일제고사 성적이 나쁘면 오후까지 수업하고 방과 후에 함께 오락하는 시간을 없앤다고 했더니 2학년 다섯 반 중에서 항상 일등을 했다.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고 나오라고 해서 냇가로 산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합창도 하고 오락도 하면서 재미있데 놀아 주다. 그러나 새로 지은 깨끗한 교실에 환경정리를 하라고 해서 교훈과 급훈만 걸어놓고 뒤에 시사판은 정리를 하지 않았더니 장학사가 검열 와서 호통을 치기에 나도 국가로부터 자격을 부여받고 학생을 지도하는 거다. 내 아이들은 내가 지도한다. 천편일률적인 이런 시사판은 오히려 학생들의 상상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맞서다가 사표를 내다. 그때의 그 순박했던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1968년 상경하여 사촌형 집에서 얹혀 지내다가 아버님 권유로 원광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하다. 학내 정원 시화전을 열다. 시인이신 박항식 교수님과 자주 술자리를 하다.
 
1969년 원광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정양시인의 국어시범수업을 참관하다.

1970년 익산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는데 동료교사해직에 반발하다가 사표를 내다. 가을에 상경하여 김지하의 “오적”이 발표된 사상계를 읽고 신춘문예에 응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1971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부문에「편력」이 당선되다. 군산중앙상고 교사로 부임하다. 공동(최학규,채규판,강상기) 시집 『이색풍토』(한얼문고)를 간행하다.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몰몬교회에 나갔는데 그 놈들은 한국말을 배우기 위하여 영어를 잘 쓰질 않아서 나가지 않다. 길 지나가는 양키놈들을 붙들고 이야기를 하면 여자 소개해 줄꺼냐고 물어서 때려치우다. 학교 직원 한 분이 독실한 개신교신자인데 교회로 인도해서 나갔다가 목사가 부자집이나 권력있는 집만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싫어서 교회에 나가지 않다. 퇴근하면 영화동이나 중앙동에 가서  술을 마셨고 심심하면 월명공원을 산책하면서 장항 쪽 제련소 굴뚝연기를 바라보다.

1972년 익산 원광여자고등학교에 부임하다. 원광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다. 총각교사로서 고3입시수업을 들어갔는데 처신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가급적 학생들과 개인적 면담을 피하다. 참으로 풋풋하고 예쁜 아이들도 많다. 아내감을 골라볼까 생각했는데 나이차가 많이 날 것이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고, 이래저래 생각을 접다. 대학원공부에다가 학생들 입시까지 지도해야 했기에 시 쓰는 일은 뒤로 미루다.

1974년 원광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다.

1975년 8월4일 뒤늦게 방위에 입대하다. 5000원을 주면 면제해준다고 하는 동사무소 병적       계 직원의 제의를 거절했더니 바로 방위 영장이 나오다.

1976년 전주경원동 동사무소에서 9월29일 이병으로 제대하다. 12월5일 7살 연하의 최승희       와 결혼하다.

1977년 원광여자고등학교에 재부임하다. 익산시 마동에 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신혼살림       을 차리다. 늦가을에 장녀 영욱이 태어나다.

1978년 익산시 영등동 변두리에 단독주택을 마련하다. 작은 정원을 예쁘게 가꾸다.

1979년 초겨울에 차녀 신욱이 태어나다.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고 해서 밤새 친구들       과 술을 마신 탓으로 다음 날 학교 수업 중 창 밖에 토악질을 하다.

1980년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더 매서운 추위가 닥치다. 나는 교권옹호위원회를 만들어 교육정상화 노력을 했다는 이유로 5.17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하여 11월에 강제 해직되다. 이후 인물연구소 임중빈문학평론가 사무실에서 출판부장으로 석 달 근무하다.

1981년 군산제일고등학교에 부임하다. 교장은 교육정상화노력을 한 열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하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광웅 시인과 함께 근무하다. 익산에서 군산까지 출퇴근을 하다.

1982년 <오송회> 사건으로 20 여 일 동안 불법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11월 25일에 구속되다.

1983년 5월 23일 선고유예로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다. 7월 28일 광주고등법원에서 법정 구속 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다. 12월 27일 대법원에서 상고기각하다.

1984년 김남주 시인과 함께 같은 방에서 지내다가 3월26일 만기 출소하다. 11월4일 견진성사를 받다.

1985년 익산에 있는 단독주택을 팔다.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전주시 우아동 18평 아파트 전세로 들어가다. 정보기관의 방해를 어렵사리 물리치고 전주한샘학원에서 대입국어강의를 하다.

1986년 생활난으로 인한 수렁 속에 미래가 보이지 않다. 전남 광주 한림학원에서 대입국어 강의를 하다. 돈이 모아지지 않아 서울로 학원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다.

1987년 서울 경일학원에서 강의를 하다. 코밑과 눈 주위에 치약을 바르고 6월 항쟁 시위에 참가하다. 방배동에 33평 아파트를 사다.

1988년 같은 동 아파트에 사는 김영석 시인을 만나다. 우연히 우편함에 있는 편지를 보게 되어 확인한 결과 바로 내 집 위층이었다. 이후 소설가 김준일, 이윤기, 시인 서정춘, 조영호도 김영석시인 집에서 자주 보게 되다.

1989년 방배동에 15평 오피스텔을 사서 책을 옮겨놓고 친구들도 주로 이곳에서 만나다.

1990년 12월 20일경 5박 6일 태국 여행을 하다. 학원 강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는데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나의 전과사실이 드러나다. 겨우 단수여권이 발급되어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보기관에서 나의 언행에 대해서 다른 강사들을 조사하다. 학원 강의가 바빠 중고 자가용을 구입하여 기사를 고용했는데 기사가 계속 말썽을 부려 면허를 취득할 필요를 느끼다.

1991년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중고차를 팔고 신형 수퍼살롱을 구입하다. 8월 초순에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일본을 여행하다. 12월 하순경 직장동료와 함께 싱가포르,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여행을 하다.

1994년 4월에 아들 현욱이가 태어나다. 늦둥이를 얻고 천하를 얻은 듯하다.

1995년 경일학원에서 강남청솔학원으로 옮기다.

1996년 1월에 싸이판을 여행하다. 3월 18일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있다』(글나루)       를 출간하다. 양수리 「사랑터울」 카페 옆에 22평 빌라를 전세 내다.

1997년 5월 18일 산문집 공저『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살림터) 를 출간하다.

1998년 3월 20일 시집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엔터)를 출간하다.  시 전문계간지 『시와 함께』겨울 호를 창간하다.

1999년 『시와 함께』 봄 호와 여름 호를 끝으로 폐간하다. 9월 진안제일고등학교로 신규 발령을 받다.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파면된 지 17년 만에 다시 교단에 서게 되다. 전주 부모님 댁에서 진안까지 출퇴근을 하다.

2000년 진안에 다세대주택 전세를 얻다. 자취하면서 지내다.

2001년 전교조 진안군지부장을 역임하다. 12월 23일 차녀 결혼하다.

2002년 아내, 장녀, 아들과 함께 1월 중국 남부지역을 여행하다. 2월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을 받다. 5월 하순에 뉴욕에서 유학중인 장녀 졸업식에 참석하고 딸, 아내, 아들과 함께  미국 동부지역을 여행하다.

2003년 3월 진안제일고등학교에서 서울 석관중학교로 전입되다. 박해전회장의 권유로 인터넷신문『참말로』에 교육에세이를 연재하다.

2004년 2월 20일 교육에세이집 『자신을 흔들어라』(문원출판)를 출간하다.

2005년 3월 방배동 집에서 가까운 이수중학교로 전보되다.

2006년 5월 2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오송회>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진         실 규명을 신청하다. 9월 중국 북경지역을 여행하다.

2007년 1월 28일 장녀 결혼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4월 3일 조사개시를 의결하고 조사를 진행하다. 6월13일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들과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다. 7월 18일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다. 10월 모친께서 영면하시다.

2008년 2월 25일 시집 『민박촌』(시와에세이)을 출간하다. 2008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다. 11월 25일 재심에서 <오송회> 사건 관계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다.

2009년 이수중학교에서 8월 하순에 정년퇴임을 하다. 아들이 민족사관고등학교에 합격하다. 9월부터 차녀가 원장으로 있는 방배동 <사랑채한의원>에서 일을 돕다.

2010년 3월 『와와 쏴쏴』(시와에세이)시집 간행하다.

2011년 10월 분당서울대 병원에서 위암수술을 받다.

2012년 3월에 아들 현욱이가 고3재학생 신분으로 『시에티카』 신인상에 당선하여 시단에 등단하다. 아들이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에 합격하다. 첫 수술에서 엉뚱한 부위를 절제한 의사의 실수로 5월에 위암재수술을 받다.

2013년 11월에 베트남 ,캄보디아 12월에 미얀마 여행을 하다.

2014년 방배동 자택에서 나와 남양주 마석 송라산 기슭에 집필실을 마련하다. 7월 터키여행을 하다. 11월 제4시집 『콩의 변증법』(황금알)간행하다.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다.

2015년 고희를 맞이하다. 서예가 현초선생의 소개로 3월부터 덕유산 아래 무주수락마을 농가에서 요양을 하다.

2016년 11월에 무주수락마을에서 남양주마석으로 숙소를 옮기다. 11월17일 부친께서 영면하시다.

2017년 7월에 제대한 아들과 함께 20일 동안 캐나다 여행을 하다. 11월 제5시집 『조국연가』(시와 에세이)를 간행하다.

2018년 복막염수술을 받다.

2019년 1월에 방배동 본가로 들어가다.

 

▲ 강상기 시인이 3일 전북문학관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전북 문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람일보

 

<강상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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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기] 롱아일랜드 죤스비치를 걷다 강상기 2010/01/12/
[강상기] 인사동골목이나 어슬렁거릴까 강상기 2010/01/07/
[강상기] 동창회에서 만난 여자 친구 강상기 2009/12/31/
[강상기] 그는 내 돈을 훔쳤다 강상기 2009/12/28/
[강상기] 친구의 아내가 가출했다 강상기 2009/12/23/
[강상기] 오늘은 낯선 내 얼굴로 당당히 걷고 싶다 강상기 200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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