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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민주 통일에 헌신해온 박석률 대표
"깨끗한 투사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다"
기사입력: 2017/07/27 [10:4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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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박석률 대표의 영정.     © 이창기 기자

 

평생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박석률 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가 25일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고인의 심장은 영면에 들고 말았다. 잠을 자다가 벌어진 일이어서 가족들에게조차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애석하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26일 소식을 듣고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 장례식장 5호실을 찾아갔다. 장례식장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동지들과 지인들이 와서 고인을 추모하였다.

 

상복을 입은 아내와 대학생 딸은 끝없이 찾아오는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틈을 내기 어려워 몇 마디 취재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인 딸의 친구들이 많이 와서 고인의 가는 길이 더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아빠의 삶과 지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지만 아빠가 늘 책을 많이 권해주셔서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는 늘 느끼며 자랐습니다.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치원 때 가방에 귤과 같은 먹을 것을 넣어주고도 아무 말도 안 해 뭉개져서 ‘귤을 넣었다고 말이라도 하지~!!’ 투정을 부렸던 생각도 나고 어디서 좋은 수첩이라도 하나 구하면 ‘우리 딸을 위해 기가 막힌 선물 가져왔다’며 건네주셨습니다.”

 

수학을 아주 좋아한다는 딸은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통계학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나라에 유능한 인재로 자랄 훌륭한 재목이었다. 유전적으로 딸은 아빠도 많이 닮는다. 공부를 잘했던 박석률 대표는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싸우느라 대학시절 이후엔 공부에서 손을 놓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하는 데나 썼었는데 그 못다 피운 공부의 꽃을 딸이 훌륭하게 피워가고 있었다.

 

물론 작은 아빠가 있긴 하지만 결혼식을 올릴 때면 아버지가 얼마나 그립겠는가. 이렇게 훌륭한 딸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수 있었는지, 눈을 제대로 감기는 감았겠는지...

 

유신독재치하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해온 선배들은 구속과 고문 나아가 사형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여 가족들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난과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전사들의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시련 중에 하나가 가족 고생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족들이 더욱 애틋하게 가슴깊이 새겨져 있다. 언젠가는 가족들도 그 마음을 알게 되면 그동안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한꺼번에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박석률 대표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뒤 10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김남주 시인 등과 함께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1995년 범민족대회와 관련해서 또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때는 조사 과정에 참혹한 고문과 구타를 이겨내야 했다. 옥중 고초를 겪었던 선배 투사들이 나이를 들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도 이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박석률 대표의 투쟁에서 후대들이 꼭 잊지 말아야할 점이 민주화 투쟁만이 아니라 자주와 통일 투쟁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민청학련 투쟁은 반 유신 민주화 투쟁이었다. 서강대 민청학련 투쟁 속에는 민주화 중심 투쟁흐름과 자주, 민주, 통일을 아우르는 진보적 투쟁 흐름이 있었는데 박석률 대표는 후자를 주장했었다. 나도 뼈저린 가난 속에서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박석률 선배의 주장에 동조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민주화만 해서는 이 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박석률 선배가 옳았던 것이다. 그래서 박석률 선배는 민청학련 사건 이후 남민전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었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박석률 대표의 서강대 후배 김택춘 선생이 장례식장에서 강조한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남민전 활동을 했던 김남주 시인, 박석률 대표와 같은 투사들이 없었다면 80-90년대 그렇게 기세 차게 타올랐던 반미투쟁, 통일투쟁의 들불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고 말고를 여전히 지금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결정한다. 핵심 군 지휘권을 미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 미군사령관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적폐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하고서는 초보적인 민주화도 이룰 수 없다. 종북몰이, 공안광풍이 불면 누구든 빨간 칠 뒤집어쓰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범민련에서 활동했던 한 통일운동가는 “많은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제도권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박석률 대표는 그런 진보적이고 본질적인 자주 통일 투쟁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평생 재야인사로 어려운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오히려 깨끗한 투사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다”며 고인을 뜨겁게 추모하였다.

 

박석률 대표의 추도식은 27일 오후 7시 열며, 28일 오전 발인할 예정이다.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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