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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도서관의 꿈, 의미
강상기 시인의 4번째 시집 <콩의 변증법> 해설
기사입력: 2014/10/31 [22:5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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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기 시인     © 사람일보
강상기 시인의 네번째 시집 <콩의 변증법>이 도서출판 황금알에서 나왔다. 시인은 194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66년 월간종합지 『세대』제1회 신인문학상과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982년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7년간 교직을 떠나야 했다. 시집으로 『이색풍토』(공저)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 『와와 쏴쏴』 등이 있고,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공저),『자신을 흔들어라』가 있다. 조영미 문학박사의 <콩의 변증법> 해설을 싣는다. (편집자)

■나와 너, 우리

▲ 강상기 시인이 네번째 펴낸 시집 <콩의 변증법> 표지.     ©사람일보
시집 <콩의 변증법>은 강상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와와 쏴쏴>의 연장선에 있다. 거칠게 말해 <와와 쏴쏴> 출간 이후 세간의 관심은 ‘강상기=오송회’로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알다시피 암울했던 군사정권시절에는 정치적 공안사건과 필화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억울함이 부지기수였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 같지 않은 소리부터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이들의 행방까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통한 사건은 우리 주변에 잠재해있다. 시절이 바뀌었다고, 그래서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작금의 세태를 보면 과연 그러한가 의문스럽기만 하다.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을 처참히 짓밟던 시절과 거대 자본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오늘의 현실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삶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강상기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와와 쏴쏴>에서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통해 사랑과 정의, 세계와 우주를 온몸으로 수용”(유안진) 했다면, 이번 시집 <콩의 변증법>은 시인의 일상을 시화(詩話)해 우리 사회 곳곳에 산재해있는 위악(僞惡)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잠시 환기해야할 점은 시의 창작배경을 알고 읽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감상 및 이해의 차이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에 동감한다면 시인의 과거사(창작배경)를 알고 읽었을 때 작품의 감상 및 이해는 한결 수월해진다. 그러나 자칫 창작배경이라는 틀에 맞추어 작품을 감상하거나 이해하려는 함정에 빠져 작품 자체의 의미를 감상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가급적 시인의 과거사(창작배경)는 피하고―이미 세 번째 시집에서 많이 언급되었으므로― 시집 <콩의 변증법> 세계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다
나는 우리 밖이 그립다
우리에 갇히겠느냐
우리에서 벗어나겠느냐

내가 그리는 무늬가 세상을 바꾼다
――「우리」 전문

 
시집 1부 처음에 실린 위의 시는 동음이의어 사용이 돋보이며, <콩의 변증법> 기저에 흐르는 시인의 ‘거대한 꿈’이 집약된 시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이 시에서 ‘우리’는 ‘나’와 ‘너’를 아우르는 대명사이며 짐승을 가두어두는 명사로도 쓰인다. 한 편의 시에서 대명사와 명사가 다른 듯 같은 의미로 형상화될 때 그 시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어떤 이는 대명사 ‘우리’로 또 어떤 이는 명사 ‘우리’로 각각 읽어냄으로써 다층적 의미로의 시적 상상력을 넓힐 수 있기에 그렇다. 언듯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겠으나 대명사 ‘우리’는 명사 ‘우리’ 밖을 감히 벗어나지 못 한다. 설령 명사 ‘우리’ 밖으로의 과감한 탈출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대명사인 ‘우리’는 명사 ‘우리’ 안으로 포섭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나’와 ‘너’를 나누는 경계이며 동시에 ‘나’와 ‘너’를 하나로 묶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밖을 그리워하면서도 ‘우리’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내가 그리는 무늬가 세상을 바꾼다”는 <콩의 변증법>의 시세계를 감지하게 된다.

앞서 시 「우리」가 <콩의 변증법> 기저에 흐르는 시인의 ‘거대한 꿈’이 집약된 것으로 본 이유는 “내가 그리는 무늬”가 과연 어떠한 무늬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무늬를 그린다는 것은 하나의 행동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이 행위를 통해 무늬는 행위자의 의도에 따른 그림으로 완성될 수 있다.
 
담쟁이는 잎과 빨판을 지니고
허공을 오르기에
꽃을 열망하지 않는다

난초는 꽃을 피워
은은한 향기를 풍기기에
열매를 궁리하지 않는다

살구나무는 꽃을 피우고
살랑거리는 녹음 속에
열매를 품는다

집 마당귀에 살구나무를 심었더니
살구나무집이 되었다
담에는 담쟁이를 올리고
방안에는 난초를 들였다
――「목적에 따라서」 전문

 
시의 화자에게 목적은 결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담쟁이와 난초, 살구나무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을 뿐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게 목적이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꽃과 열매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를 최종목적으로 생각할 때 담쟁이와 난초, 살구나무는 그들 본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가치판단에 휘둘린다. 화자가 자신의 “집 마당귀에 살구나무를 심었더니/ 살구나무집이 되었다”는 것처럼 ‘나’의 목적 또는 의지는 ‘우리’의 욕망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우리’에게 ‘나’는 왕왕 ‘나’임을 잊고 ‘우리’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고자 한다. 하여 ‘너’가 외치는 소리는 무심결에 흘리거나 외면하기 일쑤다. 「비겁한 일상」의 ‘나’는 ‘너’의 행위를 “못 본 척”하고 “생존 투쟁 데모하는” 이들을 향해 “시끄럽다 욕하”며 “짜증 섞인 불평을 한다”. ‘우리’라는 틀 밖에서 보면 이러한 소시민적 삶이 비겁해 보이지만 정작 ‘우리’ 안에 있는 ‘나’와 ‘너’는 그러한 일상을 당연한 것처럼 인지하고 살아간다. 마치 “지금은 불치의 암이 냉동된 겨울”(「개미들을 위하여」)임을 애써 외면하듯 말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말한다. “나는 뜨거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길은 내가 만들고(…) 내 앞의 발자국을 본다”고.(「발자국」) 그렇다면 화자가 만들고자 하는 길은 무엇이고 그 발자국에 어떤 무늬를 그리고자 하는 것일까.

■차이와 차별, 모순

우선 시집 표제인 「콩의 변증법」 화자의 언술에 주목해보면, 콩은 하나의 세상으로 저희끼리 모여 작은 군락(群落)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의 철학적 입장을 굳이 표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정반합(正反合)의 조화로운 세상을 바란다. ‘나’와 ‘너’의 대립이 아닌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우리’의 세상을 원한다.
 
어머니가
쌀을 방바닥에 뿌려 놓고
뉘와 돌 골라내 밥 짓는 동안
아버지는 콩 다발 마당에 펼쳐 놓고
도리깨로 두드렸지

콩 껍질 걷어내고
알맹이와 뒤섞인 모래
다시 걸러내
콩끼리 모여 사는 세상 되었어

콩이 다시 세상을 나누지
콩나물, 콩비지, 콩기름,
두부, 두유, 메주,
청국장, 된장…
――「콩의 변증법」 전문

 
콩은 “콩끼리 모여(…) 다시 세상을 나”눈다. 여기서 콩이 세상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지 콩의 본질은 아니다. 콩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콩을 주원료로 하는 음식의 이름이 다를 뿐이다. 우리의 세상도 그러하다. 똑같은 ‘나’이지만 ‘나’가 모여 ‘우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목적에 따라서” 혹은 관점에 따라, ‘나’의 입장에 따라 다른 이름을 호명한다. 정은 정끼리, 반은 반끼리 모여 합의 도출보다는 끼리의 문화를 생산해 차이를 만들고 차별을 하며 ‘우리’의 세상을 꿈꾼다. 이 시에서 화자는 무엇을 하자는 선동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한다. 즉 호명된 이름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하나이며 각각의 군락은 외연(外延) 확장을 통해 또 다른 군락을 이룬다는 것. 이러한 확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으며, 현대사회의 세분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와 너의 차이를 야기한다.
 
① 누구는 버스비 없어 5km 걸었다
누구는 비만이 싫어 5km 걸었다
――「차이·1」 전문

 
② 그 엄마는 자기 아이
반지하에 가둬 놓고
부잣집 아이 돌보고 있다

부잣집 아이는
제 엄마 품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돌보미의 노동에 잠이 든다
――「아이 기르기」 전문

 
③ 대학 등록금 마련에 빚이 졌다
그녀는 마트에서 알바해도
빚 갚을 수 없어
청계광장 나가 촛불을 들었다
물대포 맞고 돌아왔으나
기다리는 것은
불법 시위 범칙금 몇백만 원
대학 졸업해 좋은 신랑 만나
잘 살아야지 다짐도 헛되게
그녀는 성시장에 몸을 내놓았다
――「전락」 전문

 
①, ②, ③의 시는 <콩의 변증법> 곳곳에서 마주하는 우리의 불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누구는 버스비 없어 5km”를 걷지만 “누구는 비만이 싫어 5km”를 걷는다. 누구는 자신의 아이를 기르기 위해 “돌보미의 노동”을 하고 누구는 “대학등록금 마련”을 위해 “성시장에 몸을 내놓”는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지상 최고의 목적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는 황금물질만능주의를 넘어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가 없어 보인다. 혹자는 ①, ②, ③의 현실을 보며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행되는 불공정은 ①, ②, ③의 현실적 삶을 타계할 근본적 방안이 될 수 없다. 문제는 편중된 부의 축적이 타인의 삶을 이타(利他)적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는데 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가치평가 되기에 현실의 차이를 넘어 차별을 만들어내고 급기야 콩의 본질을 잊게 만든다. 기본과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는 차이가 차별을 만들고 차별은 독선과 아집으로 자신이 속한 군락에서 제왕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이렇게 보면 ①, ②, ③의 화자는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콩의 본질을 인식하고 무엇이 ‘콩’다움인가를 반성케 한다. 다시 말해, <콩의 변증법> 화자가 “뜨겁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는 현실을 직시하되 무엇이 우리의 문제인가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이와 차별의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내 발자국을 본다”는 화자의 현실직시이며 거대 담론보다 일상적 삶에서 태연히 자행되는 위악을 있는 그대로의 무늬로 보여줌으로써 실천적 행위로 나아감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콩의 변증법> 화자가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려한 수사가 아닌 지적(知的) 자극을 통해 “계산의 끝없는 욕망”(「전자계산기」)을 보여주고 “병든 자본주의 안에 당신이 있”(「앞선다는 것」)다는 것을 상기(想起)시킨다.
 
돈은 있을수록 더 부족하고
지위는 오를수록 더 싸워야 하고
돈과 지위 얻으려면
양심 버려야 하고
배려하는 충동 억눌러야 하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자가
당신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네

앞선 자는 언제나 그렇지만
앞서 봐야 더 멋진 쳇바퀴로 갈아탈 뿐
체어맨이나 에쿠스에서
벤츠나 베엠베로 갈아탈 뿐
당신의 자리 유지하기 위하여
육체와 정신 파괴하면서 살아야 하네
바퀴 닳고 엔진 망가져 폐차될 때까지
이 세상 살아남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 박탈당하고 있는가
병든 자본주의 안에 당신이 있기에
――「앞선다는 것」 전문

 
무엇에 앞선다는 것은 물질의 앞섬이 아니다. 진정한 앞섬은 “돈과 지위”를 위해 “양심”과 “배려”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은 결단코 앞선 삶이 될 수 없다. 누구보다 또는 무엇보다 앞선다는 것은 나와 너를 아우르는 우리 안에서 차이와 차별의 모순을 극복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비상할 때가 아름답다”(「깡통을 차다가」)는 소외된 것에 대한 관심이며 배려, 인정이며 사랑이다. 이러한 앞섬은 생각으로만 되지 않는다. 작은 실천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와 꿈이 없다면 시인은 세상의 무늬를 그려낼 수 없다.

■집에서 무덤으로, 꿈

시인이 발 딛고 사는 사회는 여타의 서정시에서 볼 수 있는 세상과는 다르다. 한 편의 시는 정치(政治)적일 수 없으나 그 사회의 지향점을 정치(定置)할 수는 있다. 때문에 시인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그 사회의 건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인이 그리는 무늬가 세상을 향한 변화와 변혁의 소리를 높일 때 그 사회의 권위와 폭압, 부정과 부패의 심각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사랑과 풍요를 노래하는 시가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시절에는 역설과 아이러니, 풍자와 직설화법이 많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개개인의 삶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무엇이 인간적인 삶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반성은 절실히 필요하다.
 
꿈 없는 삶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피 터지는 경쟁 부추기는 말이다

아마존 원주민은 꿈이 필요 없다
그들 삶은 싱싱하고 건강하다

자멸의 길 걷고 있는 문명한 삶은
아마존을 반사해 보라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꿈 다 이뤘다
집세 필요 없고
봉급 받기 노동 없고 지시 감독 윗사람 없고
총과 탱크 없어 군사훈련 없고 시장경제 요구 없고
숨막히는 국가보안법 없고
입시 없고 학원비 없고 자살자 없고
스님 없고 목사 없고 정규직 비정규직 없고

없는 것이 한없이 많아서 좋은 세상
자유 충만한 세상 여기에 있다
――「아마존 원주민」 전문

 
현대 문명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왔으나 역설적이게도 발전한 문명 덕에 인간성은 점점 상실되어 간다. 이는 편리함의 댓가로 치기에 더불어 행복한 삶이 요원한 구조로 전락해버렸음을 의미한다. 「아마존 원주민」은 그러한 현대 문명의 이기가 궁극에는 ‘필요 없음’에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없는 것이 한없이 많아서 좋은 세상”을 아마존으로 반사해 보여준다. 그런데 5연의 필요 없음은 아마존 원주민에게 없는 개념이다. 애초에 그러한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꿈 없는 삶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원주민의 삶이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진 5연의 “경쟁 부추기는” 삶과는 달리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이 주는 혜택을 감사히 받는다는데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가는 원주민의 삶이 경쟁이 아닌 더불어의 삶이겠지만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필요 없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대의 삶은 「목적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의 얼굴과 입장을 바꾼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고자 쳇바퀴 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행복은 은행에도 있고 지하상가에도 있고/ 엄청나게 오가는 차량 행렬에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나의 행복이 있다는/ 지옥 같은 환한 세상”(「옥상의 철쭉을 보며」)에서 “나는 나의 노예”(「나는 누구입니까」)임을 모른 채 무엇 무엇과 비교하며 “위선으로 나를 봉인”(「봉인을 걷어내도」)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집 전체를 뒤흔드는
거칠고 억센 바람이 분다

바람의 악행이 두렵다
진실과 사랑을 향한
모든 열린 문을 닫는다

이제 집들은 무덤으로 바뀌었다
오, 닫힌 문이여
――「닫힌 문」 전문

 
편안하고 안락해야 할 집이 “무덤으로 바뀌”는 것은 “바람의 악행” 때문이다. 이 시 역시 앞서 보았던 「우리」와 같은 구조인데, 여기서의 바람은 단순히 부는 바람이 아니다. 시적 상징으로 읽어보면 바람은 외부의 압력으로 “진실과 사랑을 향한/ 모든 열린 문을 닫는” 사회구조 문제일수 있으며, 진실을 가리는 거대한 권력의 억압일수도 있다. 이 시에서 ‘바람의 악행=닫힌 문’, ‘진실과 사랑=열린 문’으로 보면 ‘집=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앞의 시 「아마존 원주민」에서 시적 화자가 꿈꾸는 세상은 경쟁이 아닌 더불어의 삶 즉 인간적인 삶이었다. 없는 것이 많아서 오히려 행복한 세상에서 “진실과 사랑을 향한/ 모든 열린 문”을 향해 “대초원과 하나 된 삶”(「야생마」)을 꿈꾸는 화자에게 현실은 “일년이 지나도”(「귤과 시집」) 시집 한 권 팔리지 않으며 장애인을 차별하고(「목발」), 자식은 아비의 죽음보다 유산에 더 관심이 많다.(「어떤 임종」) 지성보다는 감성이, 겉모습만으로 인간됨을 판단하는, 죽음보다 돈에 더 집착하는 현실에서 노동력을 상실한 화자는 “무임승차로 무덤의 집으로 돌아갈”(「춘천행」)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결국 ‘집=무덤’은 소시민의 삶이 더욱 피폐해져가는 자본주의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음이다.

시집 <콩의 변증법> 화자는 “세상 뒤엎을 그 날을 꿈꾸”(「마그마」)며 “강렬한 성욕의 왕성함으로/ 세상의 무늬를 바꾸고 싶”(「바다의 섹스」)다고 했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이 꿈이 결코 거대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이다. 세상의 모든 무늬는 하나의 점으로 시작된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만들고 선은 면을 만들며 결국 원하는 무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점이며 선이고 면이다. 어떤 시공간에 놓인다하더라도 점이 없으면 세상이 유지되지 않는다. 점 하나 하나가 “심장 속에 고동치는 삶의 소리를” 듣고, “나무와 화초 속에, 그리고 이웃 사람들 속에/ 오직 하나된 삶을 살아”(「내 무덤 앞에서」)간다면 그래서 왕성한 성욕으로 건강한 사회의 원동력이 된다면 가능한 일이다.

시인은 이 거대한 세상에서 “작은 반딧불이”(「거대한 도서관」 역할을 하는 실천적 존재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며 시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꿈꾸어야 한다. 단절이 아닌 소통으로 “어둠 안에서 빛나는” 시로 세상에 의미를 던져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악적인 포즈보다 나와 너, 우리의 관계를 직시하고 긴 호흡으로 세상의 모순과 마주해야 한다. 그랬을 때 “불치의 암이 냉동된” 현실에서 “뜨거운 노래”의 진정성이 전해질 수 있을 터이다.
 
<조영미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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