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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석의 <철학산책>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지 말라"
[강대석의 철학산책-예술철학 (38)] 푸슈킨의 결투
기사입력: 2013/04/30 [08:2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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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시구로 유명한 러시아의 사실주의적인 민족시인 푸슈킨(Puschkin, 1799-1837)은 1799년에 모스크바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모르고 거드름을 피우며 삶을 즐기는 부류에 속했지만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였고 삼촌 하나는 시인이었다. 푸슈킨은 그러므로 볼테르,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에 일찍부터 친숙했고 불어를 러시아어보다 더 잘하였다.
 
1811년에 알렉산드르 1세가 페테르부르크 가까이에 있는, 지금은 푸슈킨으로 개명된 작은 도시에 귀족의 자제들을 위한 인문학교를 세웠는데 푸슈킨은 고관이었던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푸슈킨은 수학과 논리학 공부에서는 뒤졌으나 시를 잘 썼다. 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나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쿠즈토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에 패하여 퇴각하였다. 푸슈킨에게 애국적인 감정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푸슈킨은 페테르부르크의 외교부 직원이 되었는데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한가한 관직이었다. 그의 가족은 몇 년 전에 이미 이곳으로 이사를 해왔다. 푸슈킨은 춤, 도박, 결투, 음주에 빠져 환락생활을 하였으나 시는 계속 썼는데 러시아 전설에서 소재를 얻고 서구형식으로 된 최초의 장시 <루스란과 루드밀라>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시들에는 반동적인 제정러시아를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그 때문에 푸슈킨은 남쪽지방으로 추방되었다. 푸슈킨은 병, 고독에 시달리면서 염세적이 되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좋아하게 되면서 왕정에 반대하는 비밀결사단체와 연관을 맺었지만 그들은 푸슈킨을 불신하고 조직에 넣어주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은 러시아에도 미쳐 시민혁명의 움직임이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푸슈킨의 고교동창인 푸슈친이 이 움직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푸슈킨은 낙담을 하고 자기를 무시하거나 비웃는 자들과 어느 때라도 결투를 하기 위해서 열심히 권총을 구입해서 사격연습을 하였다.
 
드디어 결투의 기회가 왔다. 푸슈킨이 어떤 술집계단에서 한 장교와 어깨를 부딪쳤는데 그것을 부대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한 대령이 결투를 신청해 온 것이다. 당시에는 하찮은 일을 빌미로 결투를 하여 용기를 자랑하는 관습이 있었다. 푸슈킨은 이 용감한 대령을 쏘아 눕히고 싶었다. 결투의 입회인으로 부관이 참여하였다.
 
눈보라가 치고 얼음이 언 추운 아침에 이들은 결투 장소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16보 거리에서 사격을 했으나 두 사람의 사격은 다 같이 빗나갔다. 그들은 12보로 거리를 좁혀 다시 사격했으나 눈보라 때문에 조준하기가 어려웠으며 손가락이 얼어 방아쇠를 당기기도 힘들었다. 결국 결투를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작가 투르게네프의 도움으로 거처를 오데사로 거주지를 옮긴 푸슈킨은 유명한 장편 서사시 <예브게니 오네긴>의 창작을 시작하였다.
 
1825년 11월 19일에 알렉산드르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고 니콜라이가 황위를 계승하려 하자 12월 14일에 비밀결사대원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새 황제의 사면을 받아 푸슈킨은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었다. 여기서 푸슈킨은 다소 온건하게 되어 정치적인 시를 쓰지 않았지만 무신론적인 시 때문에 계속해서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푸슈킨은 어느 무도장에서 나탈리아라는 16세의 어여쁜 아가씨를 알게 되었고 아가씨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구혼을 하여 1831년에 결혼을 하였다.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허영이 많은 나탈리아는 푸슈킨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 푸슈킨은 부인과 함께 이 전의 고등학교가 있던 페테르부르크 교외의 작은 도시로 이사를 하였다.
 
그때 페테르부르크에 콜레라가 번져 니콜라이 황제는 임시로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푸슈킨 부부는 우연히 공원에서 황제를 만났고 황제는 푸슈킨에게 표트르 대제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참여하라는 권유를 하였다. 낭비가 심한 부인을 위해 돈을 벌어야했으므로 푸슈킨은 곧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여 외교부에 소속되어 일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푸슈킨의 부인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 때문에 푸슈킨에게 궁정시종이라는 작위를 주어 이들 부부가 궁정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이 직책을 푸슈킨은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젊은 부인은 기고만장해져 마음껏 무도회에 드나들면서 황제를 비롯한 고관들과 희희낙락하게 어울렸다.
 
푸슈킨은 한 없이 우울해졌다. 러시아민족의 소박한 정서를 사랑하고 자신의 창작활동에서 기쁨을 얻었던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여러 번 사직을 청원했으나 거부되었다.

1834년에 당테라는 젊은 프랑스인이 페테르부르크로 왔다. 부르봉왕가의 지지자였던 그는 1830년의 프랑스 7월 혁명 때문에 왕정이 무너지자 도피를 해온 것이다. 키가 훤칠하고 춤을 잘 추는 미남인 당테는 고관으로 임명되었고 궁정에서 여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의 명랑한 기질에 이끌려 푸슈킨도 그와 친하게 되었고 그는 푸슈킨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의 재치는 곧 나탈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둘은 은밀한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눈치 챈 푸슈킨은 모욕을 느끼고 결투를 신청하려 하였다. 당테는 결투를 피하기 위하여 당시 노처녀로 푸슈킨의 집에 머물던 나탈리아의 언니를 사랑한다고 털어놓았고 결국 둘은 1837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푸슈킨은 자기가 오해를 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풀었다.
 
그러나 나탈리아와의 은밀한 사랑은 계속되었고 어느 날 당테는 그녀에게 자기에게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푸슈킨은 결국 당테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당테도 받아들여 결투가 불가피해졌다.
 
결투에서는 양편에 입회인이 한 사람씩 있어야 한다. 당테는 프랑스 대사관 직원을 입회인으로 선정했지만 결투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입회인도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푸슈킨의 입회인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푸슈킨은 입회인 없이 혼자 가겠다고 했으나 상대편은 받아주지 않았다.
 
푸슈킨은 우연히 길에서 만난 동창생 단자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단자스가 입회인이 되어 한 교외별장에서 결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결투 당일 아침에도 푸슈킨은 아무 일 없는 듯 글을 썼다. 결투 장소에는 옅은 눈이 덮여 있었다. 양 입회인은 10보의 거리에 경계선을 정하고 외투를 깔아 경계선을 표시하였다. 경계선 뒤로 5보 물러나 있는 곳에서 신호에 따라 결투가 시작되었다.
 
총알은 한발씩만 소지하였다. 푸슈킨은 경계선으로 걸어가 발사를 하려 하였는데 경계선에 닿기 전에 당테가 먼저 발사를 하여 푸슈킨에게 명중되었다. 푸슈킨은 쓰러졌고 당테와 입회인들이 푸슈킨에게 달려왔다. 푸슈킨은 고개를 들면서 아직 자기에게 발사할 힘이 있으니 물러가라고 말했다.
 
당테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푸슈킨은 한 손을 땅에 집고 한 속으로 조준을 하여 발사를 하였다. 당테가 쓰러졌다. 푸슈킨은 “부라보!”라 소리치면서 다시 넘어졌다. 그러나 푸슈킨의 총알은 당테의 손을 스쳐 지나가 당테에게 명중되었는데 바지의 단추가 치명상을 막아주었다. 푸슈킨은 의식을 차리고 “그가 죽었지?”라고 단자스에게 물었다.

“부상만 당했다.”

“이상하다. 꼭 죽이고 싶었는데. 그러나 상관없다. 다시 결투를 할 테니까.”

당테는 일어나 천천히 사라졌고 두 입회인은 푸슈킨을 마차에 실어 집으로 옮겨가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나 푸슈킨은 치명상을 입었다. 총알이 복부를 관통한 것이다. 의사가 치명상이라고 푸슈킨에게 말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달려온 부인에게 푸슈킨은 말했다.

“자책하지 말아요. 모두 내 책임이니까.”

이렇게 하여 결국 러시아의 한 천재시인은 38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강대석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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