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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제 당신을 놓아드리렵니다
노무현 대통령 3주기...만남과 동행, 이별을 회고하며
기사입력: 2012/05/23 [11:4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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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흔 여섯에 바람이 났다
 
마흔 여섯에 바람이 났다. 남자 40대 중반을 파고든 바람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지난 인생을 버릴 수도 있다. 남은 인생의 미래도 망가질 수 있다. 하지만 40대 중반에 찾아온 바람기는 걷잡을 수 없었다.

2000년 초가을, 여름 내내 몽그리던 열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데이트를 신청했다.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기다림이 사나흘 지났다. 초조함이 가슴을 더욱 졸이게 하였다. 나는 그를 알았지만 그는 나를 몰랐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에게 낯선 연하의 데이트 신청이 과연 먹혀들까. 초조했지만 자신이 있었다. 지나간 인생도, 다가올 미래도 모두 버릴 준비가 돼 있는데…. 혼자의 다짐이 대담한 프러포즈를 준비하게 했다.

그에게서 마침내 연락이 왔다. “만납시다.” 인사동 골목의 허름한 밥집, ‘청기와’. 그가 지정한 첫 만남의 장소였다. 우연치고는 식당 이름이 절묘했다. 벌써 내 프러포즈가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가끔 논리보다 영감이 날 지배한다. 문지방이 낮아 머리를 살짝 부딪친 그가 이마를 문지르며 방에 들어섰다.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정색을 하며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낯익은 그가 낯선 나를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담배 피우십니까?”
“네.”
“담배 있으면 하나 주세요.”

그렇게 첫 데이트의 말문이 시작되었다. 짧은 점심시간, 우리는 긴 밀어를 나누었다. 나의 프러포즈를 토로했다. 그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쑥스러움이 역연(歷然)했다. 짐작은 갔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의 프러포즈가 있었으리라. 허나 생애 첫 만남의 직설적 프러포즈에 낯설고 쑥스러웠을 것은 이해가 될 일이었다. 늦바람 든 중년의 병이런가. 그의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연정을 더 부추긴다. 농익은 밀어가 끝날 무렵 그가 마지막 담배를 물었다.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꼭 대통령을 하셔야 됩니다.”
“도와주십시오. 가방끈이 짧아서 학계나 언론계에 약합니다.”

그는 힘도, 돈도, 명예도 없었다. 줄도 빽도 없었다. 가방끈은 짧은데 잘생기지도 않았고 멋쟁이도 아니었다. 젠틀하고는 담을 쌓았다. 그는 주류와 기득권이라는 씨줄 날줄로 틈바구니 없이 짜여진 세상에 막무가내였다. 용납할 수 없는 세상의 벽을 참지 못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세상의 상식을 거부했다. 동근돌이 돼야 가시밭길이나마 굴러갈 수 있다는 현실에 절망했다. 세상이 의무교육을 시켜가며 가르쳐온 ‘상식과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세상을 너무 사랑했다. 모난 돌도 소리치며 살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이룰 수 없는 꿈속에 살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백범’과 ‘링컨’을 흠모했다. 그렇게 되고 싶어 했다. 둘 다 ‘상놈’ 출신이다. 말년 청와대에선 김훈의 ‘칼의 노래’에 심취했다. 그런 그에게 중년의 연정으로 바람이 들었으니 누가 로맨스라 할 것인가. 누가 봐도 늦바람 불륜의 미친 짓이다. ‘가출’을 결심했다. 다음해(2001년) 2월 청와대(언론비서관실)에서 짐을 쌌다. 비서실장(한광옥)이 불렀다.

“왜 그만 두는 거요?”
“대통령 만들기에 투신하렵니다.”
“오…… 대통령 만들기! 누구를 만들려구요?”
“노무현 장관입니다.”
“오…… 노무현을……. 허허 노무현이를…….”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비서실장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느껴지고, 귓가엔 ‘별 미친 놈 다 있네’라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2. Don't say, sorry

2004년 3월 초. ‘탄핵 열차’의 기적이 들리기 시작했다. 공포스런 궤도음마저 귀에 다가왔다. 밤늦은 시각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내 결심은 분명합니다. 우리 그대로 갑시다. 그렇게 대처해 주시오.”

이미 대통령은 ‘탄핵열차’에 맞서 분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게 사전, 사후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였다. 홍보수석이던 나는 정무수석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2월 11일을 기해 17대 국회의원 4월 총선에 출마하는 정무수석을 폐지했다.) 3월 들어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거대 야당의 탄핵안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청와대 내부에도 점차 혼란과 동요가 밀려들고 있었다. 야당 요구대로 대통령의 사과를 통해 탄핵을 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대통령의 생각은 분명했다. 탄핵이 불의한 정치적 공세이며, 물러설 경우 더 이상 대통령직 수행도,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사실 탄핵 바람은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한나라당 등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 주류 세력들에게 노무현은 용납할 수 없는 대통령이었다.

취임 초 전경련의 일개 간부가 대놓고 색깔공세를 취하지 않았던가. 한나라당, 자민련에 더해 민주당(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감정과 알력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더러운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불의에 맞설 ‘역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비서실장(김우식)이 주재한 참모회의에서 수차례 격론이 벌어졌다. 낯붉히는 언사와 삿대질도 오갔다. '대통령을 구하는 일이 참모가 할 일이다. 위기를 일단 넘기고 명분도 대의도 찾아야한다' '참모가 나서서 판을 어렵게 만들면 참모가 아니다' '대변인을 두고 왜 홍보수석이 마이크를 잡나'. 맞는 말이었다.

야당이 요구하는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대통령의 의지대로 부당한 요구와 공세에 당당히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던 나는 코너에 몰렸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둘러싼 격론, 이른바 '동맹파'와 '자주파'의 격돌이후 가장 심각하고 날선 의견 대립이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라고나 할까. 절충점을 찾아 유감표명 수준의 대통령의 말을 비서실장이 전하는 것을 홍보수석이 발표하는 '간접화법'의 메시지가 나가기도 했다.

예상대로 야당은 반발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3월 9일 오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다. 72시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청와대가 1636년 12월 병자호란 때 후금(청)에 포위된 남한산성처럼 느껴졌다. 단지 다르다면 야당의 공성을 지켜보며 눈을 치켜뜬 국민이 있었다. 주화론과 척화론의 격론은 계속되었다.

어떤 선택이 진정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대통령을 위한 길인가. 끝없는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청와대에 남아있는 ‘불쌍한 대통령 노무현’과 청와대 정문을 나서는 ‘당당한 인간 노무현’의 두 모습이 쉴 새 없이 교차됐다.

결론은 내가 늦바람나 프러포즈했던 ‘인간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노무현의 길’을 선택했다. 그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 길을 이미 걸어왔기 때문이다. 1990년 3당 합당 반대, 난공불락의 부산 도전, 단기필마의 대통령 도전 등 그의 역정에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3월 12일 오후 5시부터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청와대가 일순 암전(暗電)이 되고 말았다. 그날 밤 한 공중파방송에서 탄핵안을 총지휘한 국회의장(박관용)의 특별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청와대가 암전에 걸린 그날부터 촛불이 광화문을 밝히기 시작했다. 암전상태가 33일이 지났다.

17대 총선 결과가 중계되던 4월 15일 밤. 유폐된 궁궐, 청와대의 관저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신생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했다. 프라이드치킨에 생맥주가 돌았다. 늦은 밤까지 직무정지 대통령도, 주군을 잃은 참모들도 즐거웠다. 국민이 고마웠다. 대통령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정말 국민이 두렵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서는 나를 대통령이 불렀다. “이 수석, 미안하고 고맙소.” 충혈된 눈빛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벌써 몇 번째인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데….

“If you love me, don't say, sorry."

3. 대통령을 그만 두겠소

“대통령을 이제 그만 두는 게 좋겠소.”
“……”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소. 임기를 지킨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요.”

자리엔 권양숙 여사도 계셨다. 나를 포함해 참석자 네댓 명 모두가 순간 숨을 죽였다. 잠시 동안 방안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황이 집약되었다. 등줄기가 흥건히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2006년 11월 중순, 만추의 노을이 서울을 감싸던 저녁. 비서실장을 찾는다는 대통령의 급한 부름이 전해졌다. 요 며칠 대통령의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에 청와대 밖은 너무나 뜨겁게 달아 있었다. 종부세 부과 등 강력한 8·31부동산대책의 전면 시행에도 불구하고 강남의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강남 복부인들의 손바닥 위에 대통령과 정부가 희롱을 당한 지 벌써 3개월여가 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월 9일에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해 버렸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의 양자(북-미)회담 주장을 6자(남·북·미·일·중·러)회담으로 성취시킨 지 4년. 4차례에 걸친 6자회담으로 2005년 9월, 마침내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항의 9·19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바로 이어 방코델타아시아(BDA)사건이 터져 나왔다. 북한이 이 은행을 통해 위조달러를 유통하고 자금세탁을 했다며 미 재무부가 마카오에 있는 BDA은행의 북한 예금을 동결해 버렸다. 이어서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공식 발표했다.

참여정부가 출범과 함께 끈질기고 집요하게 추구해온 2개의 핵심정책, ‘부동산 안정대책’과 ‘북핵 해결과 한반도평화 정착 방안’이 동시에 무너져 버렸다. 새삼 대통령의 얼굴이 납빛으로 굳어 있었고,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

탁자에 노공주가 놓여 있었다. 중국의 노씨 집성촌에서 선물한 일종의 고량주였다. 포도주 2잔이나 막걸리 2-3잔이 전부였던 대통령이 독한 노공주를 벌써 몇 잔 들이킨 게 분명했다. 나도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고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잔을 비우고 채웠다.

지난 9월, 10월의 국내외 상황은 앞이 안 보이는 암흑 그 자체였다. 북한의 무모한 핵실험으로 4년 대장정의 6자회담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 버렸다. BDA사건과 북한 핵실험으로 한반도는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강남 3구 등 이른바 부동산특구의 ‘아파트 광기’는 내년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청와대를 향해 무차별 난타전으로 번졌다. 이런 와중에 홍보수석(이백만)의 “지금 집을 사면 낭패 본다”는 발언이 여론에 휘발유를 끼얹고, 급기야 건교부장관, 경제보좌관, 홍보수석의 경질 파동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전효숙씨에 대한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에 한나라당이 제동을 걸었다. 무력감이 청와대를 휘감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대통령은 참석자들의 의견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대통령님, 이번만은 저희들 의견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새로운 시련과 새로운 도전을 맞았을 뿐입니다.”
“부동산은 이백만 수석이 했던 말이 맞습니다. 분명히 내년부터 후회의 목소리들이 나올 것입니다. 6개월은 지켜봐야 정책효과가 드러납니다.”
“북한도 이미 카드를 소진했습니다. 염려했던 것이 터졌을 뿐입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대통령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긴 한숨과 함께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쓰러운 그의 뒷모습이 순간 울컥하게 했다. 독주 탓인가, 어지럽기도 했다.

후일담이지만 이백만의 예언은 맞았다. 8·31대책에 금융대책(DTI규제 등)이 병행되면서 다음해(2007년) 중반부터 부동산 열기는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 들어 부동산 안정이 지속된 원인도 이에서 비롯됐음은 사실이다. 북핵 실험도 노무현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다음해 10·4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사즉생(死卽生) 정신의 소유자였다.

4. 아름다운 슬픔-그리움

2006년 1월, 전남 함평과 전북 고창 일대에 대폭설이 내렸다. 폭설 피해가 막심했다. 대통령이 직접 살펴보겠다고 했다. 짧은 겨울 낮 시간에 눈 속에 파묻힌 두 곳을 돌아야 했다. 청와대-성남비행장-광주비행장-함평군-고창군-광주비행장-서울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함평군 폭설 피해 현장을 살피고 고창군으로 이동하는 헬기에 대통령과 동승했다. 10여 분을 날았을 때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대통령이 물었다. “이 실장, 고향이 장성이지요, 지금 지나가는 길 아니요?” 이게 웬 일인가. 정말 헬기가 내 고향 장성군 남면 마을 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보였다. 고향마을의 눈 덮인 황토 집(남상도 목사가 조성한 황토테마마을)들이 무더기로 반짝거렸다.

“바로 저기입니다. 황토 집들 보이는 곳이 제가 태어난 마을입니다. 심상명 장관(국민의 정부 마지막 법무부장관) 고향도 같습니다.”
“아, 그래요. 좋네……. 퇴임하거든 봉하에서 고향 살리기운동 할 테니까, 이 실장도 고향에서 한 번 해보세요.”
“봉하하고 제 고향마을하고 자매결연 맺으면 되겠습니다. 제 고향 황토 집에서도 가끔 쉬시고요.”
“그럽시다.”

2008년, 자연으로 돌아온 그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정말 시작했다. 가끔 봉하마을을 찾을 때 논길을 걷는 대통령을 보면 마음이 찔렸다. 다급해지기도 했다. 내 고향마을 황토 집에 한 번 가셔서 쉬시자고 할 엄두가 아직 안 났다. 방문하는 순간 우리 고향마을과 봉하마을 간에 바로 MOU(?)를 체결할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 고향에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고향 마을도 봉하처럼 감 주산지였다. 전남지방에 유기농 농법을 확산시킨 남상도 목사가 있었다. 즐겁고 유익한 방문이 될 것임이 눈에 선했다.

2008년 9월 6일, 내 큰 애와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금원 회장의 아들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3월 어느 날부터 두 애가 좋아해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강 회장이 봉하마을에 혼사 보고를 했다. 대통령이 대뜸 “주례는 내가 하겠소”라고 결정했다. 비록 전직 대통령이지만 주례를 서주신다는 전언에 잠시 머뭇거렸다. 고맙고 감사했다.

참여정부 실세들의 ‘초호화 결혼식’이라는 대문짝만한 기사가 몇몇 족벌신문을 장식했다. 사설까지 실었다. ‘푸른 초원 위에 축하 비행’이라는 자극적 제목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충북 충주에서 골프장을 경영하는 강 회장이 그날 오후 자신의 골프장에서 결혼식을 기획했다. 강 회장은 허례허식을 싫어했다. 명분 있는 씀씀이는 가리지 않았지만 ‘짠돌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남대문시장파’였다. 그날 아들·딸 둘을 한꺼번에 시집·장가보내려는 발상도 강 회장식 사고였다. 서울의 웬만한 호텔에서 두 번 치르면 2~3억을 쓸데없이 허비한다는 실용파였다. 노 대통령을 주례로 모시니 서울서 하면 그 상황이 어떨지도 감안했다. 초청객도 가족 외에 50명씩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소문을 타고 보도가 나가고, 불청객과 구경꾼, 기자들까지 몰려들고 말았다. 강 회장에게 뒷날 총경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물어봤다. 모두 1천 2백만 원이라고 했다.

문제는 ‘축하비행’. 골프장 근처에 경비행기 매니아가 있었고 그는 강 회장과 친분이 있었다. 그가 직접 축하비행을 해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곤 그 전날 문방구에서 어린이용 색종이를 몽땅 사와 직접 가위질했다. 색종이를 뿌린 경험이 없던 그가 혼자 경비행기를 몰며 뿌리려니 식장 외곽으로 날아갔다. 일부 참석자들은 농약 살포하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일부 신문의 악의적 보도였지만 대통령께 죄송스러웠다. 정치탄압의 선전포고였다. 대통령은 의연했지만 점점 옥죄어오는 권력의 칼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대통령 주변 인사들에게도 소리 나게 조여들었다.

강 회장이 추악한 권력의 표적이 되었다. 엉뚱하게 대전지검이 총대를 메고 뇌종양 판정을 받았던 그를 구속시켰다. (그는 그때의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병마와 싸우고 있다. 그를 기소했던 검사들은 무죄판결에도 승승장구했단다) 야당도, 진보언론도 모두가 숨죽였다. 정치검찰의 여론호도에 동참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정치결사체를 만들기로 했다. 마침내 2009년 5월 22일 밤, 속리산 자락 조그만 건물에 후일 국민참여당의 모태가 된 전국조직 50여 명이 모였다. 발제강연을 했다. 당당하게 나서 추악한 권력과 오도된 여론에 맞서자고 결의했다. 자정을 넘겨 2시까지 격정의 술잔이 오갔다.

잠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휴대폰을 여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었다.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속리산을 나서 서울로 차를 몰았다. 집에 들어섰다. 7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집사람도 거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김경수 비서관’ 이름이 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대통령께서 위독하십니다.”
“……"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리셨습니다.”

광주서구의회 사무실 창밖으로 ‘5월 광주’를 품고 있는 무등산이 보인다. 무등산에 ‘노무현 길’이 있다. ‘5월 광주’로 촉발된 ‘부림사건’을 맡으며 일상의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민주투사로 그리고 지역주의 극복의 십자가를 지고 도전의 역사를 개척해온 노무현이 탄생했다.

지난 3년, 메마른 그리움이 슬프게 했다. 어느 비구니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슬픔은 그리움’이라 했다. 이제 그를 놓아드리고 싶다. 40대 중반의 ‘바람’을 불렀던 연정을 털고 그를 역사 속에서, 내일의 미래에서 만나고 싶다.

‘안녕, 노무현’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 전 청와대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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