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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꺾어 봤어?
웃통 벗고 햇살 가득 받으며 제주도 명물 채취하는 즐거움
기사입력: 2012/05/06 [10:4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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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제주도의 명물인 고사리를 꺾었다. 멀리 한라산 꼭대기가 보이는 제주도 표선면 중산간 산록에서였다. 햇볕이 따뜻하며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날씨가 맑아서 기분이 상쾌했다. 날씨보다 더 기분 좋은 건 처음 고사리를 따러 나온 내 눈에도 수월하게 눈에 뜨일 만큼 넉넉한 고사리였다.

고사리 순은 땅위로 한 뼘쯤 솟아서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살짝 꼬부린 채 손길을 맞았다. 고사리 순의 아랫부분을 잡고 꺾으면 말랑말랑한 줄기가 또옥 하고 부러진다. 곁에는 벌써 쥘부채 모양의 잎이 많이 퍼지고 딱딱해서 먹을 수 없는 고비들이 즐비하다. 고사리 순은 꺾어도 자꾸 솟아나는데 처음 솟는 ‘맞물 고사리’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함께 간 할망 두 분도 허리를 굽힌 채 고사리 꺾기에 삼매경이다. 평소에는 허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하는데, 앙증맞고 싱싱한 자연산 고사리 순을 대하니 아픈 몸도 잊게 되는 모양이다.

목장주인의 조언을 받아 다른 장소보다 훨씬 고사리가 많은 곳을 고르게 되었다. 말과 소를 키우는 목장의 초지였다. 지형이 평탄하고 말먹이로 풀을 베어내서 뱀에 놀라거나 가시덩쿨에 손을 긁힐 염려 없이 채취를 할 수 있으니 이 날 작업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말이나 소나 염소 같은 초식동물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다. 생고사리의 어떤 성분이 동물들의 생리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풀밭에 가축을 방목하면 다른 풀은 뜯기어 키가 작은데 고사리만 옴쭉 크게 자란다.

봄이 오면 제주 아낙들은 바빠진다. 제주 아낙네들은 새벽부터 산 속 깊이 들어가 풀과 잡목을 헤쳐가면서 고사리를 채취한다. 덤불 아래나 잡목 틈에서 고사리 순을 찾아내 꺾는 작업이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게다가 고사리에 정신이 팔려서 이 숲 저 숲을 누비다가 길을 잃어서 고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마다 봄철이면 수십 건의 실종사고가 발생하고 불행하게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다. 고사리철이 되면 제주방송에서는 안전사고를 대비해 이렇게저렇게 하라는 안내방송을 거듭한다.

그래도 해마다 봄이 오면 아낙네들은 등에 자루를 메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산속으로 들어간다. 젊은 아낙네들보다 나이 든 할망들이 훨씬 더 많다. 4월 중순부터 약 한 달간 작업한다. 아무래도 산 아래턱의 고사리를 먼저 채취하고 점점 산 위로 올라가게 된다.

하루 종일 일하면 솜씨에 따라 15~30kg의 생고사리를 채취한다. 채취한 고사리를 가공공장에 팔아서 돈을 만든다. 올해에는 생고사리 1kg에 3천5백원을 받는다고 한다. 가공공장은 이것을 삶고 말려서 건고사리를 만들어 도매로 넘긴다. 고사리철에 나서면 하루벌이가 6만원은 되고, 솜씨 좋은 사람은 10만원을 쥘 수 있으니, 손속이 맵짠 제주 할망들로서는 부지런을 떨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분은 봄철 내내 비가 오나 강풍이 부나 하루도 빼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꺾는다. 제주 기후에는 ‘고사리 장마’가 있다. 고사리 채취 철이 되면 여름 장마철처럼 비가 많이 내린다. 어느 날은 얌전히 내리는 게 아니라 사납게 휘몰아쳐 천지분간이 어렵다. 빗물을 듬뿍 머금은 땅에서 젓가락 길이만한 고사리 순이 쑥쑥 솟아나니까 고사리 장마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나야말로 놀멘놀멘 소풍 삼아서 나온 셈이라 연신 봄을 소재로 한 가곡, 유행가를 목청껏 부르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면서 느슨하게 꺾었다. 그래도 점심을 들 무렵이 되니까 자루가 묵직했다. 풀밭에 자리 펴고 찰밥에 김 가루를 비벼 먹으니 꿀맛이다. 야외에서 일하다가 먹는 밥처럼 맛있는 밥이 있을까.

경치 좋은 산 속에서 배불리 먹고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니 몸도 마음도 노곤해진다. 드러누워 낮잠 한 숨을 달게 자고 싶은데, 같이 간 할망들은 벌써 일어나 고사리를 꺾는다. 나만 게으름 피우기가 뭣해서 느린 소걸음으로 오후 작업을 시작했다.

한낮이라 땀이 났다. 밀짚모자를 쓴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등도 축축해져서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려웠다. 주저 없이 나는 웃통을 다 벗어부쳤다. 맨살에 와 닿는 햇살의 느낌이 참 좋았다. 인적 없는 산 속에서 남정네가 웃통 벗고 고사리를 뜯는다고 해서 흉잡힐 일이 있겠는가.

그런 치레에 갈피 잡혀 살아야 하는 도시의 삶을 멀찍이 벗어나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한 여름에도 양복에 넥타이를 조른 채 출근하고, 사무실에서나 윗도리를 벗어볼 뿐 업무차 사람을 만나거나 업체를 방문할 때는 다시 반듯한 정장차림을 갖춰야 한다. 사실 자유라는 건 별것 아니다. 입고 싶을 때 옷 입고 벗고 싶을 때 옷 벗을 수 있다면 그게 자유로운 거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에는 공원이건 해변이건 남녀노소 섞여 많은 사람이 팬티 차림으로 앉거나 누워서 햇볕 쬐기를 한다. 백인들은 멜라닌 색소가 적어서 햇볕을 자주 쬐어야 피부건강이 유지되니까 그런다고 하지만, 그걸 목격하는 우리 눈에는 그 풍경이 일견 외설스럽기도 하고 일견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철 해수욕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림이다. 맨살로 적당히 봄볕을 받으면 피부가 건강해진다. 아토피나 피부곰팡이, 가려움증 같은 피부질환이 멀어지고 기분도 말끔해진다. 태양의 정기가 살 속 깊숙이 파고들어 온몸의 피를 타고 돈다.

오후 2시에 채취 작업을 마쳤다. 한창 신명이 나서 뜯는 판인데 할망들이 그만 가야 된다고 한다. 3시부터인가 제주 올레길 안내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흔이 넘은 분이 참 부지런도 하다 싶다. 채취한 고사리를 차에 싣고 길 양편에 편백나무가 즐비한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구릉 가득히 노란 유채꽃밭이 화사하게 펼쳐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늘에서 노란 물병이 쏟아진 것인가. 나를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수많은 어린이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하다. 햇빛의 무지개 색깔 가운데 노란색만 실컷 골라 먹어서 노랗게 핀 것일까. 하여튼 봄볕은 영양이 풍부하다.

그 볕을 먹고 고사리는 새 순을 틔우고 유채는 노란꽃을 가득 피운다. 나도 오늘 등짝으로 솔찮이 봄볕을 받았으니까 무슨 순이 돋든지 무슨 꽃이 필런지도 모르겠네, 이런 헛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들통에 고사리를 쏟아보니 꽤 많다. 거의 프로급 할망들이 채취할 만한 양이지 않을까 싶었다. 상하기 전에 삶아야 한다는 말은 들었으므로 채취한 고사리를 물에 행군 다음 마당에 가스불을 켜고 들통에 물을 부어 푹푹 삶았다. 불땀이 좋아서 그런지 조금 지나자 마당 가득 고사리 냄새가 진동했다.

육지 것에 비해 향이 진하고 부드러워 예부터 한라산 고사리는 제주의 자랑거리다. 평소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어쩌다가 저 남자가 의젓잖게 고사리나 꺾어다가 삶으면서 흐뭇해할까 하고 혀를 찰지 모르겠다. 그래, 너희들도 어느 봄날 산 좋고 경개 좋은 이곳에 와서 웃통 벗고 고사리를 꺾어 봐라. 그런 다음 막걸리를 벌컥 마시면 세상이 참 아늑하게 보일 것이다.

혼자서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이제는 잘 삶아졌겠지 들통을 살펴보았다. 물을 쏟고 고사리를 보니 좀 이상했다.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고사리가 서로 엉겨 붙어 떡처럼 되었다. 여린 순을 소죽 끓이듯 삶아댔으니 떡이 되는 게 당연했다.

생고사리는 삶아서 말려야 한다는 것은 얻어 들었지만, 어느 정도 삶아야 하는지는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푹 삶아야 된다고 지레짐작한 탓이다. 그때서야 할망에게 전화해 보니 너무 오래 삶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고사리맛이 다 날아간 건 아닐 거니까 잘 말리라는 훈수다.

허허허. 더 삶았더라면 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떡에서 그친 게 다행 아닌가. 모르면 아랫사람에게라도 묻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고, 몰라서 빚어진 잘못은 실수가 아니라 사고일 터이다.

늘 초보자는 겸손해야 하거늘 기초 요령도 모른 채 제멋대로 덤비면 몸은 고달프고 허방집기 마련인 걸 아직도 모르는가. 덩어리로 뭉쳐진 고사리를 일일이 펴서 널어놓으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고사리한테 인생 한 수를 배운 셈이다.

건고사리를 만들어 남에게 팔 물건도 아니고 내가 먹거나 나를 찾아온 이들이 먹을 것이므로, 향내가 덜 나도 별 상관없다. 누구라도 찾아오면 나물이든 육개장이든 부침개든 간에 이 고사리를 듬뿍 넣은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리라.

이 몸이 어느 봄날 한라산 중산간에 올라가 웃통 벗고 꺾어온 자연산 고사리라고 너스레를 치면, 자기들도 이구동성으로 참 맛 있다고 맞장구를 치겠지. 떡이 된 고사리가 웃을 일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박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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