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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자금 모금 위해 국내 잠입한 여전사
[인물 평전] ‘임시정부의 며느리’ 정정화 여사
기사입력: 2011/03/19 [11:5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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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요인과 함께 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여인이 정정화 님.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들이다.     ©박상기 논설위원

일제의 폭압 36년 식민통치에 목숨 바쳐 저항한 독립운동가는 남자들만이 아니다. 응징의 폭탄을 던지고, 총칼로 적과 전투를 벌이고, 국외에 임시정부를 세워 저항의 횃불을 치켜든 일이 남자들의 투쟁이었듯이, 제 2선에서 그들의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안전한 잠자리와 식사를 뒷바라지한 여자 역시 열혈 남자에 못지않게 치열한 투쟁을 했다고 본다.

88세에 입 열어 토로한 일대기 <장강일기>

‘임정의 며느리’ 수당 정정화(1900~1991) 여사는 바로 그런 여전사이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에서 마흔다섯 살에 해당하는 기간인 192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무려 26년간 궁핍한 망명객들로 채워진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돌보고 가난한 임정 살림을 꾸렸으며, 목숨 걸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자금 모금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임정과 우파계열 독립운동사의 생체험자이자 ‘역사의 증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죽기 3년 전인 88세에 펴낸 자신의 일대기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26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는 임시정부와 같이 살았다. 백범의 말대로 ‘거지나 다름없는’ 상해 시절 어느 때는 이동녕, 차이석, 이시영 같은 분들과 시장 뒷골목에서 동전 한 닢짜리 국수 찌꺼기를 달게 사 먹기도 했고, 등 뒤로 왜놈의 기관총 쏘는 소리를 들으며 임정의 피난 짐 보퉁이를 싸기도 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의거로 임정은 상해를 급히 떠야 했다. 그녀는 이동녕, 이시영과 함께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한다. 이후에도 일경의 끈질긴 추적을 따돌리느라 도피와 이주는 계속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중국 내륙까지 점령해 들어오자 사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일제의 내륙침략에 맞서가며 생존을 지킨 임정의 피난투쟁은 수만리에 걸친 ‘고난의 연속’이었다.

항주, 호남성 장사, 광동성 광주와 불산, 광서성 유주, 사천성 기강현을 거쳐 1941년 1월, 중경의 외곽지대 토교에 정착할 때까지 임정의 피난투쟁은 9년간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질병으로 죽고,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본군 진영을 탈출, 수천리 길을 걸어와 광복군에 합류하는 조국의 젊은이들을 보는 감격도 맛보았다.

“이동녕 선생[주:1940년 3월13일 서거]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때나 백범의 부인 최준례 여사[주:1924년 1월1일 서거]의 식어가는 손을 보듬어 쥐었을 때는 마치 암담한 조국의 꺼져가는 숨결이 내게 와 닿는 듯했고, 하늘을 깨뜨릴 것 같은 드높은 사기로 무장된 청년 광복군들이 이국의 하늘 밑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모습을 바라 볼 때는 당장 내일이라도 독립된 조국을 품에 안을 듯싶었다.”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그녀만큼 장구한 세월 동안,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웠던 임정을 껴안고 요인들과 동고고락을 같이 한 여인이 있던가. 그러나 그녀는 임정에 대한 헌신적인 기여에 비해 이름과 공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 후 역대 국내 정부로부터도 대우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다. 되찾은 조국도 그녀에게 결코 편안한 삶을 주지 않았다.

동갑나기 남편마저 6.25가 앗아갔다. 남편 김의한은 평생 삶의 반려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다. 해방후 남편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김구 선생을 모시고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가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월북하여 생사조차 모르다가 아내마저 죽은 최근(2006년)에야 1964년 10월9일에 서거하여 평양 근교 ‘재북인사묘역’에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 또한 전시인 1951년 9월에 ‘비상사태 하의 특별조치령 위반’(부역죄)이란 억울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한 달간 옥고를 치르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1991년 91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칠 때까지 그녀는 좀처럼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 속에 살다가 영면했다. 죽기 몇 해 전에야 마지못해 자신의 생애를 진솔하게 토로한 단 한 권의 회상기 <장강일기>를 내놓았다. 그녀는 지금 대전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러 6차례 국내에 잠입

그녀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8월3일,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과 이인화의 2남4녀 가운데 3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디 이름은 묘희이었으나 상해 망명 중에 이름을 ‘정화’로 바꾸었고, 해방 후에도 이 이름을 써 세상에는 ‘정화’로 알려졌다. 부친은 충남 예산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집안은 유복했다.

그녀는 1910년 열 살 나이로 외무대신, 법무대신을 역임하고 당시 대한협회 회장으로 있던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의 3남 성엄 김의한(1900~1964)과 결혼했다. 신랑 역시 열 살이었다.

드디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날이 왔다. 법도를 지키며 조신하게 살던 양반가의 스무 살 젊은 며느리에게 새로운 운명이 다가왔다. 민족이 떨쳐 일어나 ‘독립만세’로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의 해인 1919년의 10월,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하고 총재로서 항일운동을 이끌던 시아버지 김가진은 대동단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아들인 김의한을 대동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 때 김가진은 74세의 상노인이었다. 그녀 또한 석달 뒤인 1920년 정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상해에서 남편과 합류한 그녀는 안창호, 이시영, 김구, 신규식 등 임정 요인들과 교유하며 홀로 망명해온 임정의 요인들을 알뜰히 모신다.

그 해 3월, 그녀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임시정부 자금 모집의 밀명을 띠고 첫 번째 국내 잠입을 감행한 것이다. 일본 사찰기관에 얼굴과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젊은 여자라서 일경에 대한 눈속임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그녀를 발탁한 것이다. 그녀는 기꺼이 그 임무를 받아들이고 담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완수해낸다.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의 집에 머물면서 모금을 마친 그녀는 한 달 만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사히 모금해온 돈을 전달한다. 그녀의 이러한 국내 잠입은 1921년 봄(2차), 1922년 6월과 10월(3,4차), 1924년 12월(5차), 1930년 7월(6차)로 여섯 차례 이어진다.
 
월북한 남편의 생사조차 모른 채 영면한 ‘민족의 여인’

그녀의 삶은 위난과 고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암흑과 질풍노도의 시대조차 맵고 슬기롭게 이겨낸 ‘민족의 여인’이었다. 망명 초기인 1922년 정신적 지주였던 시아버지 김가진을 잃고, 다음해 재정적 후원자였던 친정아버지 정주영마저 돌아가셨지만, 그 후 수십 년 동안의 긴 세월에 맞닥뜨린 망명의 생활고와 수만리 장정의 험난한 여정을 남편과 합심해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갔다.

민족상잔의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남편의 생사조차 모르고, 자신도 옥고를 치르는 불운을 겪었지만, 그녀는 험악한 세월을 외아들 김자동(1928~ )에 의지한 채 인고와 침묵으로 이겨냈다. 조금도 과거의 공적을 드러내거나 내세워 보상을 받으려 하지 않고 은신하듯 일생을 단정하게 마감했다.

평생 어려운 일에 앞장서고 겸손하게 수신하면서 식민지의 삶, 굴욕의 삶을 거부한 채 올곧게 ‘사람의 길’을 걸은 ‘민족의 여인’ 정정화 님에게 헌사를 보낸다. 이 여인의 삶과 정신이 어찌 한 편의 감동적인 작품으로 재현되기에 모자랄까 싶다.
 
 
<박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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