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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률 <두만강 따라 천릿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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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률 <두만강 따라 천릿길>
천평벌, 유서 깊은 겨레의 개척지
[장경률의 두만강 따라 천릿길(14)]개산툰편(1)
기사입력: 2013/02/09 [12:0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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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산툰지역은 남강산맥의 하단이지만 의연히 산이 첩첩한 변강산촌이다.     © 김승산 기자

우리 두만강천리길 탐방팀이 개산툰에 도착하자 진당위 서기 리웅현, 진장 김호와 광소촌 당총지서기 겸 촌주임 김용수가 뜨겁게 맞아주었다. 그들의 안내하에 두만강변의 룡바위, 하넓은 천평벌, 선구산성유적지 등지를 돌아보면서 이 땅에 력력한 우리 민족의 력사적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우리들의 심정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가장 일찍 개척된 고장
 
천리두만강은 저 멀리 백두산자락의 발원지에서 용솟음쳐 굽이굽이 수백굽이를 돌고 수천개의 여울을 치면서 삼합을 지나면 개산툰경내에 이른다. 대산을 가르고 량안의 험준한 계곡을 돌파하고 룡바위턱에서 굽이치면서 천평벌에 흘러든다. 여기서 두만강은 그 감로수로 천평벌을 더없이 비옥하게 한껏 적셔주고 따발산꼬리를 물고 유유히 동북켠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저 멀리 동해가 보이는 것이다.
 
개산툰은 이 이름부터 재미가 난다. 뜻과는 달리 개산툰시가지가 두만강변의 좁은 남산밑에 붙어 앉았고 산등성이우에 개산툰섬유팔프공장의 주택구가 자리잡았다.
 
우선 그 이름이 우리 말 구성법과는 달리 동사, 명사가 결합된 동빈조합의 한어이다. 게다가 우리네 조상님들이 마을이름을 지을 때 대체로 평(坪)이요 동(洞)이요 천(泉)이요 하면서 지형 지물을 명사화한 것과는 달리 동북의 한족들이 흔히 쓰는 툰(屯)자를 붙이였다. 개산툰이라는 지명은 두만강연안에서 색다르게 보게 되는 한족지명인 것이다.
 
개산툰이라는 뜻풀이도 산이 열리면서 형성된 고장에 자리잡았다고 하는 데서 특이하다. 개산툰은 자연의 힘으로 두만강이 남으로 흘러들면서 북으로 쳐 나가는 남문과 북문을 열었다면 서켠문은 길을 내고 철길을 놓으면서 인간의 힘에 의하여 산을 가르고 문을 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룡정쪽에서 남강산줄기 덕신령을 넘으면 개산툰으로 들어가기 전의 첫 마을 이름이 바로 석문이다 바로 개산툰을 드나드는 돌문, 이 돌문을 지나면서 량켠은 하늘을 치받고 아츨하게 솟아오른 형제봉의 절벽, 만물상으로 이룬 기암괴석으로 장식되여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절경이다. 이 <<돌문>>을 나서면 불시에 산이 확 열린듯 가로세로 직경이 10여리에 달하는 20리 천평벌이 안겨 온다. 1000여헥타르에 달하는 벌판, 개산툰은 이름 그대로 산이 열리면서 이루어진 기이한 고장이다.
 
개산툰지역은 우리 민족이 이 고장에 정착하면서 두만강서안에서 가장 일찍 개척한 고장의 하나이다. 자고로 천평벌과 그 주위를 중중첩첩 둘러선 뭇산들은 밀림이 우거지고 골이 깊으며 땅이 비옥하여 만물의 생장에 더없이 훌륭한 터밭이였다. 곰, 승냥이, 메돼지, 노루, 사슴은 물론이고 산중의 왕 호랑이도 호구를 붙이고 정착하였던 천연사냥터였다.
 
개산툰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문물과 력사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에는 일찍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다. 청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200여년간 사방을 둘러막은 봉금지로 되여 인적이 끊겼다. 지난 19세기 50년대를 전후하여 함경도 북부지방 특히 개산툰과 마주한 종성과 삼봉지역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수렵과 인삼 등 진귀한 약재채집을 하고 벌목도 하면서 왕래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라농지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년(1869년)부터 조선 북부지방에 련속 전대미문의 대흉년이 들면서 수많은 기민들이 가만히 두만강지역에 숨어들어 게릴라식농사를 지으면서 화전민이 나타났다. “월강하면 단두대에 올라 목이 잘리우는” 살벌한 세월이건만 국법도 무시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천평벌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 정착하는 조선인들이 대거 늘어났다.
 
청 정부는 개산툰지역에 조선인들이 많이 집거하자 광서 20년에 이곳에 녕원보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개태, 개발, 개화, 개문, 개운 등 13개 사를 설치하였다. 그후 1922년에 상기한 이름의 첫 자인 ‘개’ 자에 지정학적으로 뭇산에 둘러싸인 고장이라 그 ‘산’을 덧붙여서 개산툰이라고 정식 호칭한 것이다.
 
천평벌의 노란자위, 광소

눈뿌리가 아득하게 펼쳐진 천혜의 곡창, 기름진 천평벌을 바라만 봐도 가슴은 들먹거리고 마음은 풍요롭다. 방금 논에 낸 파릇파릇한 벼모들이 거울 같은 논에 비쳐 천평벌은 더구나 초록일색인데 산자락에 자리한 파랗고 빨간 양철지붕의 광소촌마을들이 동화속의 그림처럼 동경을 자아낸다.

고유의 광소촌은 천평벌에 솟아난 몇개의 샘물터를 중심으로 상천평, 중천평, 하천평 마을로 나뉜다. 근래에 몽기동, 북동, 남동, 삼동포가 광소촌에 편입되면서 광소촌은 7개 자연툰으로 늘어났다.

현재 광소촌 상천평에 거주하고 있는 박태인 로인(1922년 출생, 현 89세)에 따르면 천평벌은 원래 나무 한그루 볼 수 없는 습지였는데 1890년, 조선 길주군에서 이주한 장씨가 천평벌에 개간의 첫 삽을 박았다고 한다.
 
하넓은 천평벌은 위만주국 강덕황제의 어곡미까지 맡았던 천혜의 곡창이다. 지난 세기 30년대 천평벌이 벼농사가 잘된다는 소문을 듣고 최학출이란 농군이 조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광소촌 하천평으로 이주해왔다. 최학출은 재래의 산종농사를 타파하고 ‘유지온상육모법’을 창안하였는데 콩기름을 바른 세면종이를 모상판우에 덮어 벼모를 키워서 논에 냈다.

최학출의 논에서 자란 벼는 소출이 높았고 알알이 구슬처럼 투명하고 밥을 지으면 찰지고 밥맛이 특별히 구수했다. 발 없는 말 천리 간다고 최학출의 유지온상농법이 위만주국의 중시를 받게 되었다. 1941년 12월, 최학출은 장춘으로 불려가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올릴 어곡미를 생산하라는 특명을 받게 되었다.

시인 심정호 선생은 ‘강덕황제의 어곡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 매년 양력 5월 9일이면 연변지역에서 제일 먼저 벼모내기축제를 어곡전에서 펼친다. 1000명이 먹을 비빔밥을 만드는 장면.     © 김승산 기자
“모내기철이면 하얀 버선을 신은 꽃 같은 처녀들이 유리판처럼 써레질을 해놓은 논판에 들어서서 물차는 제비처럼 찰랑찰랑 모를 심는다. 가을도 가관이다. 새하얀 수갑을 낀 처녀들이 사락사락 한포기 한포기씩 벼를 베여 정성들여 묶은 다음 마당에 곱게곱게 낟가리를 앉힌다. 찧어낸 쌀은 마을의 고운 아가씨들이 모아들어 뉘와 귀 떨어진 쌀알들을 골라내고 눈귀도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 모아서 눈덩이같이 하얀 옥양목주머니에 넣어 절복한다.”


몇년래 광소촌에서는 ‘어곡전’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2006년에 ‘어곡전비’를 세운 토대에서 해마다 ‘어곡전농부절’을 개최함으로써 ‘어곡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 촌에서는 규모화경영을 위해 ‘어곡전협회’를 설립하였는데 현재 100명의 촌민들이 이 협회에 가입하여 300여헥타르에 달하는 ‘어곡전’을 다루고 있다. ‘어곡미’는 이미 연변의 명브랜드 소문 높아 북경, 상해 등 국내대도시에 진출한 것은 물론, 장춘 위만황궁박물원에까지 전시,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천평벌의 선두주자

현재 광소촌에는 586가구, 총인구 2247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조선족촌이다. 경작지면적이 970헥타르에 달하는데 그중 수전면적이 300헥타르를 차지한다.

‘전국특등로력모범’ 김룡수는 광소촌 당지부서기 겸 촌사무위원회 주임이다. 김룡수는 부임한 15년래 촌민들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고 쾌남아의 뚝심으로 촌민들을 이끌고 경제강촌을 건설하였다.

김룡수는 우선 농업생산구조조정을 대담하게 개변하는데 살손을 대고 축산업발전에 모를 박았다. 2008년, 김룡수는 황소사양대상을 쟁취하고 빈곤부축자금 40만원을 조달받아 황소 100마리를 구매, 선후로 90세대에 나누어주었다. 지금 광소촌의 20여호 농호에서 평균 10여마리의 황소를 키우고있는데 2011년에 230여만원의 등록자본으로 설립된 몽기동황소전업합작사는 현재 180마리의 소를 사양하고 있다.

김룡수는 여러 경로를 통해 농업주문을 받아 농민들이 시장수요에 따라 시름 놓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현재 촌의 농업주문작물면적이 180헥타르에 달해 촌민들의 수입이 대폭 늘어났다. 2005년에는 빈곤부축자금 30만원을 쟁취해 100여호 농가에서 렉수토끼양식업에 종사하게 하였고 2006년에는 30만원을 쟁취해 7헥타르의 오미자생산기지를 건설하였다.

사회활동능력이 강한 김룡수는 해당부문과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촌민들을 대량 해외에 내보냈는데 현재까지 해외로무를 다녀온 촌민이 연인수로 도합 600명에 달한다. 해외로무를 통해 촌민들은 소득을 많이 올렸을 뿐만 아니라 견문도 넓혔다.

현재 광소촌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마을도로는 전부 포장도로로 바뀌고 촌민들은 수도물을 마시고있으며 마을마다 일매지게 곱게 꾸며져 유람객들의 발목을 끈다.
 
항일투사 수많이 배출한 전설의 땅

광소촌 몽기동 남산언덕에 혁명렬사기념비가 숙연하게 서있다. 기념비에는 항일명장 김광진의 일대기가 새겨져있다.

1902년 1월, 조선에서 출생한 김광진은 1908년 광소소학교에 입학하여 항일사상에 어섯눈을 트기 시작했다. 1922년에 남경대학을 졸업한 김광진은 1924년에 혁명에 참가하고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6월, 김광진은 북만공농적위대 대장직을 맡았으며 1933년에 밀산유격대를 창립하고 참모장을 력임했으며 1934년에 항일동맹군 제4군 참모처장을 담임했다. 1936년 8월, 김광진은 항일련군 8군 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있다가 그해 말 흑룡강성에서 영용하게 전사하였다. 김광진의 옛 생가는 백여년의 풍진세월을 이겨내고 지금도 잘 보존되여 있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경건케 했다.

항일투사를 많이 배출한 이 고장에서는 항일에 관한 무용담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호미긁개이야기’는 지금도 촌민들 속에서 회자되고 있다.

삼동포에는 힘꼴을 쓰는 태양욱이란 열혈청년이 있었는데 그의 머리속에는 온통 반일사상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1932년 한여름, 태양욱이 불볕더위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기음을 매고 있는데 일본집사대의 세놈이 총을 메고 마을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적들의 총을 빼앗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태양욱은 멀리서 기음을 매고 있던 마을의 2명 친구들을 불러 호미를 메고 상점으로 향했다. 일본집사대놈들은 상점에서 총을 옆에 세워놓고 이미 약담배를 피운터라 눈이 게슴츠레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태양욱이 먼저 호미로 집사대 대장의 대갈통을 내리찍었다. 호미가 빗나가는 바람에 놈의 귀가 허망 떨어져나갔다. 나머지 두놈도 2명의 마을청년에 의해 불의의 타격을 입고 대가리를 땅바닥에 틀어박았다. 세 청년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세자루의 총을 각기 하나씩 잡아들고 마을 뒤산으로 내뛰였다. 급기야 정신을 차린 집사대의 세놈은 죽기살기로 뒤를 쫓았다. 하지만 세 청년은 빼앗은 총을 다룰 줄 몰라 쫓아오는 놈들을 쏘아 눕히지 못하고 그냥 뛰기만 하였다. 밤이 되여서야 놈들을 따돌린 세 청년은 그 걸음에 항일유격대가 활동하는 자동골 연두봉으로 찾아가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가장 일찍 선 통상사무소
 
20세기초 리씨조선왕조는 두만강을 건너 월경하는 이주민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북경락사 어윤중이 조정에 “월강인들을 막을 방법이 없나이다”고 상주문을 올리자 조정도 이를 묵과해버렸다. 얼마후 리씨조선과 청나라는 지방관청 사이에 ‘길림조선상민수시무역규약’을 체결하였다. 이때가 바로 광서 9년(1883년)이였다. 그 이듬해 청나라 조정은 길림장군 오대징에게 중, 조 대외무역을 발전시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화룡욕에 통상국을 설치한 토대에서 광제욕(오늘의 광소촌)과 서보강(오늘의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통상분국을 앉히고 중, 조 통상사무를 처리하였다.
 
오늘날 개산툰통상구는 개산툰진 남켠에 위치하였다. 그 맞은켠은 바로 조선 종성군 삼봉리이다. 여기에 있는 다리는 1920년에 놓은 것인데 시초에는 떼목에 철기를 깐 가교였다. 그 이듬해 2월에 목교로 바꾸고 1922년에 홍수에 밀려가자 1925년 룡정일본총령사관과 연길도윤이 체결한 ‘국제철교부설협정’에 근거하여 철교를 부설한 것이다. 1934년 도로, 철도 량용교를 개축하였는데 1945년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쏘련홍군이 다리 일부를 폭파하였다. 지금의 통상구 다리는 1953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다. 오늘날 이 통상구는 중국, 조선 두 나라 인민이 친선래왕하는 친선의 다리로 그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 해마다 음력 7월 15일 백중절이면 천평벌의 노란자위지역에 터를 잡은 어곡전에서는 농부절축제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농악무의 한 장면.     © 김승산 기자

 


 
 
 
 
 
 
 
 
 
 
 
 
 
 
 
 
 
 
 
 
 

▲ 농부절축제에서 그해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장원을 뽑아 포상을 한후 꽃가마에 태워서 온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축하해 준다.     ©김승산 기자

 
▲ 농사일이 아무리 고달파도 농군들은 하루일이 끝나면 이처럼 농악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 김승산 기자



<연길 = 글 : 장경률/ 사진 : 김승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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